가끔은 젖어보자
가끔은 젖어보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6.3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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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랑 정말 나이 먹나봐. 요즘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 울어 대네”

“자기 신랑도 그래? 우리 신랑은 아예 화장지 옆에다 갖다 놓고 운다니까, 그래서 어이가 없어 나랑 애들이랑 드라마보다 그 사람을 쳐다본다니까”

요즘 모임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짧은 대화를 듣고 세월 앞에 생리적으로 남성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얘기를 한다면 한 남자의 당연한 갱년기 현상으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물론 남편의 권위나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어떤 암묵적 요구를 떠올린다면 주책스럽다고 표현할 일인지도 모르지만요.

건강과 관련된 주제로 강의를 하는 저에겐 나름의 보건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탄생을 경험한 귀한 생명들이며, 그 귀한 생명을 위해 단 한번의 쉼도 없이 뛰고 있는 심장에게 몸에게 기본적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끄집어 내지 못한다면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지식의 습득만이 될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생명 탄생의 순간을 느껴보라는 의도를 담아 제 모든 강의안의 첫 장은 연초록의 싱그런 ‘상수리나무 새싹’ 사진입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참 건조합니다. 못내 아쉬움이 남아 여러가지 경우의 수로 이해를 시도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사진 자체로만 감동 하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새싹사진에 앞서 잘 나간다는 여자 아이돌 사진을 붙여넣기 해보았습니다. 아이돌 사진이 화면을 채우자 학생집단은 바로 탄성을 지르며 열광합니다. 이어 나온 새싹 사진엔 눈치 빠른 몇몇의 학생들이 못내 “우와~” 하고 적당한 리액션을 보일 뿐입니다.

엔돌핀은 천연 진통제입니다. 전쟁터에서 부지기수의 동료들이 총탄에 죽어갈 때 제 다리를 관통한 총상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이돌 사진을 보고 열광할 때처럼, 엔돌핀은 행복하고, 기분 좋을 때, 많이 웃을 때 우리의 몸에서 분비됩니다. 한동안 이 엔돌핀 열풍에 웃음치료가 각광을 받았습니다.

최근엔 내면으로의 사색을 끌어내는 힐링이 대세인데 이는 엔돌핀보다 4천배 효과가 있다는 감동호르몬인 다이돌핀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나 좋은 음악이나 좋은 시, 좋은 글을 접했을 때 혹은 새로운 깨달음이나 아주 멋진 사랑에 빠졌을 때 다이돌핀은 생성되고 분비됩니다.

우리는 한 주먹의 건강보조식품을 통해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깔깔깔 웃고, 깊이 사랑하며 감동만 받으면 우리의 몸은 초강력 면역제이고 항생제이며 진통제인 게다가 중독성마저 없는 천연 마약인 엔돌핀과 다이돌핀을 선물합니다. 그것도 단 일원의 비용적 소모 없이 순수하게 말입니다.

길 구석, 조그맣게 핀 야생화가 보내는 유혹의 자력조차 이기지 못해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카메라 단추를 연신 눌러대는 저로선, 홍수처럼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색(色)짙은 정보와 유머들의 자극에 무덤덤해져 그나마 남아있던 웃음기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뭄에 갈라지는 목 타는 논밭 같아 뭔가 싸리한 감동이 터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것이 바쁘고 힘들어 웃을 여유도, 누릴 감동도 없다는 사람들과 이미 높아진 눈높이를 낮추지 못하고 더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는 이들에게도, 설령 터져 나오는 그것이 눈물일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기꺼이 마음만 내어준다면 노래 한 곡이면 어떻습니까? 한 송이 야생화와 뉘엿뉘엿 지는 노을 가득한 장면 한 컷이면 감동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눈 안 가득 물기가 차오르며 느껴지는 안구의 통증과 가슴 시리도록 저미어내는 마치 ‘동작 그만’의 순간처럼 벅차오르는 감동에 가끔씩은 젖었으면 합니다. 또, 우리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훔쳐내는 다소 주책스런 남편의 모습에 당황하셨어요? 저는 그것이 숨기지 않는 그대로의, 사람냄새 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양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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