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시위’가 아닌 ‘축제 한마당’에 참여한 단막극 ‘희극배우’였다.
그래서 ‘촛불시위’란 용어 대신 ‘촛불 문화제’란 말에 동의키로 맘먹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표정은 그들의 잔치를 인정치 않는 듯 한 뉘앙스를 풍겼다. 단 한명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환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축제’가 모두의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그림자는 근심, 거부에 가깝다고 판단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래”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가 그들의 모습을 글자로 옮겨 놓은 최적합 문장이다.
책상에 앉아 글을 써 대는 ‘위선자’가 순간적으로 아주 평범한 일상사 속에서 용어에 대한 정의를 얻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무표정한 그들의 모습이 전하는 메시지가 ‘촛불 시위나, 문화제냐’에 대한 결론을 명쾌히 내려줬다.
그들이 부르짖는 구호가 연도에 있는 시민들을 불편케 했다. ‘고시철회’‘전면 재협상’까지는 들어 줄 수 있지만 ‘정권퇴진’은 듣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들고 다니는 팻말이 붉은색 일색에다 적혀 있는 구호마저 동일하다는 것은 ‘조직적’임을 표출하는 과오를 빚었다.
붉은 띠, 글씨만 봐도 노동운동을 연상하는 울산 지역민들에게 이번 집회의 배후 세력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도 실책이었다.
군데군데 구호를 선창하는 세력이 있었다. 자연 집합적으로 모이면 일정한 구호가 정해지지도 않을뿐더러 전후의 흐름이 맞지 않기 마련이다.
앞에서 선창하면 뒤에서 받아 잇는 기간 조직이 있음은 보다 더 큰 ‘실체’가 존재함을 알리는 증거다.
현장에서 평화로운 맘으로, 질서를 지키며 걸어가는 군중들은 ‘축제’의 축포 속에서 ‘시위’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참가자들은 모르는 사이 지역민들이 이런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면 일정 장소에 모이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은 일회성으로 끝내는 것이 옳다.
“촛불 들고 나온 사람보다 집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고 투덜대던 한 가정주부의 푸념은 ‘촛불 축제, 시위’를 가늠하는 잣대다. / 정종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