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鷄肋)
계륵(鷄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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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호의새이야기]
닭의 갈비는 크게 먹을 것이 없다는 뜻에서 버리기는 아깝고 남에게 그냥 주기에는 아까운 물건을 비유한다. 출전은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

한중(漢中)땅을 놓고 위(魏)의 조조(曹操)와 촉(蜀)의 유비(劉備)가 싸울 때의 얘기다. 진퇴를 놓고 고민하던 조조는 심복장수인 하후돈이 찾아와 군호(암호)를 결정해 달라고 하자 계륵(鷄肋)이라고 한다. 당시 주부(主簿)로 있던 양수(楊修)는 이 말을 듣고,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짐을 꾸리고 철수 준비를 한다.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 하자 양수는 “무릇 닭의 갈비는 먹음직한 살은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공은 돌아갈 결정을 내릴 것이다(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라고 말한다. 양수는 한중 땅이 계륵과 마찬가지로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지킬 만큼 대단한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조의 심중을 간파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조조는 곧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재주가 뛰어난 양수는 군심(軍心)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삼국지연의’는 양수가 여러 차례 조조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을 저질렀음을 전한다.

‘치세(治世)의 능신(能臣),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는 (허자장의) 인물평(‘異同雜記’)도 있지만, 조조는 문무를 겸한 걸출한 영웅이다. 박문강기(博聞强記)했으며 시문(詩文)과 저술, 식견으로도 한 세상을 떨쳤다. 칠실삼허(七實三虛)의 ‘삼국연의’에서 조조가 재능 있는 문사(文士), 지식인들을 용훼하거나 폄하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조조가 직·간접적으로 죽인 학자나 문사는 양수 외에도 예형, 공융, 순욱, 순유, 최염 등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조조는 이런 지식인이나 선비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들 때문에 후세 사가들의 비판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칼이 강하냐, 펜이 강하냐’는 질문은 부질없는 우문에 속한다. 동(東班)과 서(西班), 문(文)과 무(武)를 완전히 분리하고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회의한다. 무(武)라는 것이 단순히 사람을 찌르고 베는 창검의 기술과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고의 경지를 넘어선 칼은 붓이 추구하는 완벽한 이상(理想)과도 상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날카로운 명검(名劍)의 맑고 눈부신 검기(劍氣)는 뛰어난 문장(文章)과도 같고, 뛰어난 무장(武將)은 결과적으로 문치(文治)와 무위(武威)·예악(禮樂)의 성세(盛世)를 이루어왔다. 펜의 역사는 칼의 역사에 종속되고 굴복해왔다. 그리고 결론은 칼(武)을 가진 문(文)이 강하다. 문제점과 해결책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고 책상물림의 나약한 문사(文士) 체질로는 강건한 상무정신에 바탕을 둔 통합적인 정신세계를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극복할 수 없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바꾸면 융합이고 통섭이다. 중국이 추구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인 말.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라는 뜻. 이 연구를 통해 중국은 고구려(고조선, 부여 포함)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의 편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편치 않지만, 그 내면에 있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은 문(文)과 무(武)의 소통과 융합이며, 결국 힘이나 재물, 기술 같은 무(武)가 역사와 문학 같은 문(文)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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