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공업 축제의 추억
울산공업 축제의 추억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3.05.0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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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축제가 열리는 날은 남외동 공설운동장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시내 중고등학생도 전원 참가했다. 공업축제 개막일은 대개 6월 1일이었다. 이날이 울산시 승격 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학생들이 교복을 동복에서 하복으로 갈아입는 날이기도 했다. 검은색 동복을 벗어 버리고 밝은 색의 하복으로 갈아입은 학생들의 행렬이 산뜻했다. 축제기간에 시내버스 일부는 공설운동장까지 노선 연장 운행을 했다.

공업축제의 하일라이트는 가장행렬이었다. 이 행렬에는 각 기업체와 고등학교가 참가했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자동차 조립 단계를 보여 주는 미완성 차량들을 차례로 내보냈다. 조선소에서는 대형 유조선 모형을 갖고 나왔다. 비료 공장에서는 커다란 비료포대를 쌓은 차량 앞뒤로 풍년을 상징하는 형상들을 선보였다. 그런가하면 학생들은 처용과 헌강왕 행렬, 신라 충신 박제상 행렬 등을 연출했다.

행렬은 공설운동장에서 출발해 학성공원, 시계탑네거리, 태화교, 울산시청을 거쳐 공업탑까지 행진했다. 행렬이 통과하는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관람했다.

그 외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공설운동장 씨름장에서 밤늦도록 벌어지던 씨름대회도 흥미진진했다. 씨름장 한켠에는 우승자에게 상품으로 주어질 황소가 매여 있었다. 학성공원에서는 그네타기 대회도 열렸다. 길게 매단 그네 발판에 그네의 진폭을 잴 수 있는 줄이 달려 있었다. 진폭이 가장 넓게 그네를 탄 사람이 우승자였다.

당시 공업축제는 학생들의 역할도 컸다. 우선 축제 성화를 채화하던 공업탑에는 여고생들이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개막식의 매스게임과 카드섹션도 학생들의 몫이었다. 매스게임이나 카드섹션은 오랜 연습과정이 필요했다. 학생들과 지도교사들의 고충이 뒤따랐다. 수업결손도 꽤 있었던 것 같다.

가장행렬 뒤에는 교련복 단독군장을 한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남학생들은 목총을 멨고 여학생들은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구급낭을 멨다. 학도호국단이란 이름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던 학생들은 오와 열을 맞추고 팔을 높이 흔들며 행군했다.

학교별 취주악대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행사장에서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행렬의 중간 중간에서 군가를 포함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장면이지만 당시는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가 높이 걸렸던 시절이었다.

공업축제는 1967년부터 시작됐다. 공업단지 기초가 조성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정부가 주도 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을 기념하는 성격도 있었다. 울산의 중요한 랜드마크가 된 공업탑이 조성된 것도 이 때였다. 1994년 28회 때부터 처용문화제로 이름을 바꿔 어어 오고 있다.

필자는 공업축제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울산의 숙원이었던 실내체육관 건립 부지를 고(故)이종하씨가 울산시에 기부하는 장면을 본 것이 중학생 때 열린 공업축제 개막식에서였다. 그 때 건립된 체육관이 종하체육관이다.

고등학생 때는 당시 야당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최형우 전 의원이 개막식 축사에서 울산의 공해 문제에 경종을 울리던 모습도 봤다. 당시 어떤 신문은 이를 ‘공해 열변(熱辯)에 울산공업축제 찬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최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공단이 들어선 지 18년이 되도록 당국의 무책임과 기업체의 무성의로 공해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1968년에 개교한 필자의 모교인 한 초등학교의 교가에는 ‘강산도 아름다운 우리 고장은 공장연기 치솟는 공업의 도시’라는 가사가 있다. 공장연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 울산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에게는 공업축제가 공통의 추억이다. 그 축제에서 울산의 정체성을 터득하고 역사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지역사회 공동체의 과제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직 가난했던 시절 울산공업축제는 소박한 컨텐츠로 꾸며졌지만 그래도 시민 축제로서는 충분했던 것 같다.

강귀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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