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달
일렁이는 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4.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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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끄는 매력은 무궁하다. 누구나 살면서 숱한 달을 보아왔을 테지만,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 달은 몇 번이나 될까.

어린 날을 돌이켜 본다. 그날은 아마 가까운 친척의 제삿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겨울밤이었는데 휘영청 떠 있는 달빛이 수정처럼 맑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인적 드문 길을 종종 걷는데 길모퉁이를 돌고 돌아도 달은 여전히 등 뒤에서 따라왔다.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해서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는 ‘어두운길 밝게 걸으라고 착한 달이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날 밤 달은 불을 끄고 누운 이부자리를 비추더니 마침내 꿈속까지 따라왔더랬다.

또 한 가지 또렷한 기억은 어둠이 내린 마당 저 멀리 뒤뜰을 한참 지나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오금이 저렸는데, 때마침 보름달이라도 뜨면 얼마나 반가웠던지.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가끔 그때 기억을 돌이키며 내 아이들에게 달 얘기를 할라치면 돌아오는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아이들에게 달은 어쩌면 그저 커다란 돌덩이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달은 힘들었던 시절 재래식 환경에서 불편하게 자란 구세대의 아릿한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일까. 사실 회색 빌딩 사이로 보이는 달은 색깔도 정감도 옛날 같지 않다.

살다보면 문득 오랜 기억을 찾아 나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날의 모임은 그렇게 만들어진 느닷없는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도 있듯, 여자 넷이 모였으니 접시뿐만 아니라 밥그릇도 깨질 판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가는 도중 들른 ‘토성도예’촌은 젖은 감성에 기름을 끼얹었고, 안개를 피워 올리며 몽롱하게 흩뿌리는 봄비는 풍경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리듯 향하게 된 정자바다는 우리를 몽환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책이야기를 하던 중 마침 눈앞에 보이는 ‘몽돌인문학 서재’를 들르게 됐다. 그 곳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이층을 통째로 빌려준다’는 소중한 정보를 접하자마자 깊이 생각지도 않고 덥석 일박 신청을 했다. 함께 간 회원들도 쌍수를 들어 환호했다.

드디어 디데이. 작은 독서모임을 끝내고 서로의 상황에 맞추어 출발을 했다. 작은 독서모임은 형태도 규격도 없는 토론장인 만큼 주고받는 말들도 좀 더 활달하다. 나는 다른 일을 마무리 짓고 오후 세시를 넘어서야 ‘정자’로 향했다. 장소에 도착 하니 먼저 온 회원들이 이불 속에 옹기종기 발을 넣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목소리마다 주체 할 수 없는 설렘으로 톤이 높다. 둥그런 유리로 시야가 탁 트인 창밖으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바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은 짜릿함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머지 회원들도 속속 도착했다. 임원들이 준비한 회와 저마다 챙겨온 맛깔 나는 반찬이 방 가운데 한가득 펼쳐졌다. 갓 지은 뜨끈한 밥과 김치와 오밀조밀 밑반찬은 가히 꿀맛이었다. 다들 책만 열심히 읽는 줄 알았더니 살림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하호호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그 많던 음식이 푹푹 줄어들었다. 역시 바깥에 나와서는 먹는 재미를 빼 놓을 수가 없나 보았다.

그러는 사이 달은 이미 하늘 한가운데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각자 따뜻한 모포 등을 두르고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였다. 끝 모르게 펼쳐지는 이야기보따리도 찰랑이는 금물결 은물결을 따라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보이는 달과 가슴 속 달이 왁자하게 밤바다를 흔들었다. 맨발에 닿는 금모래의 감촉이 아련한 꿈결 같았다. 아닌 밤중에 왁자한 여인네들의 수다에 바다도 놀란 듯 움찔거렸다. 가슴에 달과 바다를 담는 사이 방은 점점 깊어져가고 있었다. 먼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불빛도 희미하게 흔들리며 삶의 단내를 뿜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기고 화제의 생기도 제풀에 잦아들 무렵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회원이 생겼다. 돌아가기 쉬운 가까운 거리에 이렇게 멋진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얼핏 잠이 들었던가. 희뿌옇게 물드는 창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동작을 멈추고 스마트폰의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의 바다 속에서 막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수평선위에서 바로 떠오르는 해였다. 일부러 일출을 보러 다녔던 때도 정작 일출을 보는 일에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허겁지겁 했다.

어느 사이 달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은 또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유혹할 것이다. 달은 우리 감성의 마중물인 것도 같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의 일탈은 짜릿한 쾌감으로 남아있다. 보름달과 일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 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전해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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