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水三山·벽파정·구강은 어디갔나
二水三山·벽파정·구강은 어디갔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3.24 2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잃어버린 삼산·반구
한삼건교수의도시이야기
▲ 본격적으로 개발되기전인 1980년 초반 삼산들 모습. 제공=서진길 사진집

 

울산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천혜 ‘물의 도시’

일제 필요 의한 개발… 도시운치·역사 모두 상실

앞의 글에서 지역의 역사와 특성을 활용한 도시디자인이 왜 필요한지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울산 도심부 디자인 방안을 알아보기 위해 그 첫 순서로 남구 삼산동 일대와 중구 반구동 지역이 과거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그것이 왜 지금과 같이 변모하고 말았는지 더듬어 보고자 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1930년대 이전의 울산은 물의 도시였다. 동구나 북구, 울주군의 해안지역이 아니라 울산광역시의 도심인 중구와 남구 일대가 그랬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중구 내황마을 일대는 한반도 전역에서 모여드는 상선으로 붐볐다는 사실을 ‘구강서원지’가 전해 준다. 이 모습은 내황장이 섰던 마을 뿐 만이 아닌, 태화강과 울산만으로 연결된 포구일대가 모두 이런 풍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도시재개발에 따른 친수성 하천으로 1995년부터 20년간 투자해 복원중인 오사카 도톤보리강.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굳이 신라시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울산은 예나 지금이나 국제도시이다. 현재 자동차 수출의 선박이 입출항하는 염포 삼거리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왜관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부산에 남아 있던 왜관모습을 참고하면, 이곳에는 왜인들의 주택과 점포, 종교시설, 정박시설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인들과 더불어 당시 유구국(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사람들이 오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외국과의 교류가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이었지만 울산에는 외국인이 오가고 멀리서 상인들을 실은 배가 무시로 드나들던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이처럼 울산에 외국인이 오가고 여러 지역에서 상선들이 모여들었던 것은 울산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질 좋은 포구를 특별히 갖춘 도시였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발행된 5만분의 1지형도를 펼쳐보면, 지금의 남구삼산동 일대와 북구 양정동, 효문동 부근이 대부분 바다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바다를 접한 곳에 삼산(三山)이라고 하는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나지막한 바위산이 삼산들과 해수면이 만나는 곳에 서 있었다. 시가화 돼 버린 오늘날의 삼산과 오버랩되기는 어렵겠지만 그 때의 삼산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드넓은 강과 들판 가운데 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360도 전방향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방 백리 범위의 풍광이 눈에 들어 왔을 것이다.

▲ 아래는 삼산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1914)으로 내황·돋질산·염포산·여천천이 함께 보인다.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전에는 이 삼산들과 함께 들판을 적시는 여천강과 태화강을 합쳐서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고 불렀다. 밀려드는 푸른 파도를 바라보는 삼산 위 어디쯤에는 벽파정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 맞은편 반구동 서원산 위에는 구강서원(鷗江書院)이 있었는데, 이 서원 이름은 ‘갈매기가 노니는 강’이라는 목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반구동은 원래 이름이 ‘성황당리’였다. 여기서 성황당은 울산고을 성황신인 박윤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후기가 되면 이 지역의 유학자들이 성황당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한다는 ‘반구동(伴鷗洞)’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성황당과 반구동, 벽파정의 그 어느 것도 모두 울산만 일대에 펼쳐진 강과 바다가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금의 울산 중심부일대는 배가 드나들고, 갈매기가 노래하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그런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육지화 돼 지금과 같은 시가지로 변화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에 있었던 수리조합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수리조합사업이란 농지소유주가 조합원이 돼서 관개사업을 시행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물 부족 없이 농사를 짓고 나아가서 소출도 늘리자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수리조합 사업이 펼쳐졌는데, 실제로는 많은 농민이 이에 반대하거나 저항했다. 그 이유는 수리조합이 하는 일이 논에 물을 대주고 가을이 되면 그 비용을 받아갔기 때문이다. 울산수리조합의 경우도 당초에는 지금의 북구 농소일대까지 모두 대상지에 포함됐으나 농민들의 맹렬한 반대로 제외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수리조합 사업은 한 마디로 태화강 물을 취수해 농토에 공급하고 대신 물값을 받는 ‘물장사’와 강변과 해변의 황무지나 미개간지를 개간해 농토로 만든 다음 이를 통해 소작료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같은 목적 때문에 수 천년 이어지던 울산 포구의 역사는 단절됐고, 상선이 오가던 포구는 논으로 변했으니 문자 그대로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 되고 말았다. 그 뿐 아니다. 태화강과 동천강변에는 새로 강둑이 생겨나서 포구마을과 강을 영원히 격리시키고 말았다. 삼산과 대도(현 아산로) 일대의 염전도 이 사업으로 사라졌다. 바다를 매개로 상업과 교역의 도시로 발전해 온 울산의 특성이 하루아침에 농촌마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삼산들의 농토는 시가지로 변모하게 됐다.

만일 이때 근시안적인 수리조합사업을 벌이거나 강둑을 만들지 않고, 포구 모습을 유지하며 발전했더라면 울산은 1990년대의 삼산개발이 바다를 매축해 가면서 진행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수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물과 해안선을 살린 도시개발이 진행돼서 온갖 종류의 배가 오가고, 드넓은 수변에는 광장과 공원이, 그 너머에는 빌딩이 늘어선 시가지가 조성된 멋진 물의 도시가 됐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한번 농토로 바뀐 단절된 강은 1960년대 이후 공업도시로 본격적인 성장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평범한 도시로 만들어 버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우리가 늘상 보는 것처럼 삼산 신시가지는 울산의 역사적 특성이나 입지적 특성은 보이지 않고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도시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울산에서는 강이 있지만 강은 잘 보이지 않고, 항구도시이면서 항구와 시가지는 한참 격리돼 있어서 도심에서 강과 바다가 주는 감흥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웃 일본의 오사카시도 울산과 비슷한 면이 있다. 지금의 나라와 교토 일대에 고대국가가 성립했을 때부터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오사카는 말 그대로 물의 도시(水鄕)였다. 에도시대의 오사카는 도시 곳곳에 강과 운하가 흐르고, 그 강에는 온갖 이름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난 고도경제성장기 때 자동차 통행을 우선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하천과 운하를 죄다 복개해 버렸고, 그 결과 지금은 도심 교차로마다 에도시대의 옛 다리 이름만 남아 옛 모습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오사카시는 물의 도시 오사카의 특성을 스스로 지워버린 것을 크게 반성하고 있다고 한다.

울산의 경우 이같은 근시안적인 개발은 왜 일어났는가. 이는 울산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개발이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나 대한민국 중앙정부같은 타자(他者)가 필요에 의해 울산을 개발하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울산의 진정한 가치에 눈감은 채, 필요로 하는 것만 선별해서 개발하고, 소비하고, 폐기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토지자원은 유한하고, 한번 개발된 토지는 다른 용도로 바꾸기 힘들 뿐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현대인의 가치관은 금전과 물질, 당장의 효율에만 매몰돼 있다. 게다가 20세기 이후 등장한 거대 자본과 거대 기술은 산과 바다도 깎고 메우는 힘을 지녔다. 작금의 상황이 이런 만큼 도시를 개발하고 새 디자인 옷을 입힐 때는 오히려 신중하고 겸허한 태도가 요구된다. 삼산이 일제강점기때 포구와 염전에서 농토로 바뀌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당시로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이후의 삼산과 울산이라는 도시의 운명을 크게 바꾸고 말았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