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문학의 물결
실버문학의 물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2.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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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시바타 도요의 시 ‘약해지지 마’)

지난 1월 20일, 98세에 처녀시집 ‘약해지지 마(くじけないで)’로 데뷔한 세계 최고령 시인 시바타 도요(柴田トヨ)가 타계했다.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의 한 양로원에서 숙환으로 숨진 그의 나이는 101세였다.

9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산케이 신문 ‘아침의 시’ 코너에 우연히 자신의 시가 소개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이 코너 담당자는 솔직하고 따스한 그의 시에 반해 출판을 적극 권했고, 이 시집은 무려 15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쉬운 말로 따뜻한 위로를 담아 낸 그의 시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 독자들의 마음도 촉촉이 적셨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살아가며 깨달은 생의 이치를 진솔하게 표현해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동일본대지진으로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치유와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준 존재가 됐다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가 타계하기 며칠 전에는 75세의 구로다 나쓰코(黑田夏子)가 최고령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ab산호’라는 단편소설로 당선된 구로다는 와세다대 교육학부 출신으로 교사와 사무원 등으로 일하며 틈틈이 글쓰기를 해오다 은퇴 후 본격적으로 소설에 도전했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고유명사와 대명사를 쓰지 않는 등 실험성이 강한 작품으로,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노년 세대가 은퇴 후 글쓰기 열정을 다시 불태워 문학상을 받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그도 또한 작품 구상과 집필에 10년 이상을 보내며 끈질긴 각고의 노력 끝에 영예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자리 잡은 이른바 ‘실버문학’의 바람은 한국 문단에서도 이미 일기 시작했다. 이 단어가 딱히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며 실버산업이 각광받는 가운데 탄생한 단어로 보인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평균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며 40~50대는 물론 60대 당선자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은 대표적인‘올드 장르’로서 나이 든 창작자에게도 접근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분야인 까닭에, 실버문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겨난 용어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2008년, 소설가 박완서가 ‘친절한 복희씨’로 실버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마흔 살에 문단에 데뷔한 그는 여든에 숨을 거두기까지 쉼 없이 글밭을 일궜다. 은퇴한 60~70대 노인들의 다양한 삶의 풍경을 담은 이 소설집은 출간 4개월 만에 20만부 이상 팔리는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평론가 김병익이 ‘노인이기에 가능한 원숙한 세계 인식, 삶에 대한 중후한 감수성’이라 평한 실버문학이었지만, 30~40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령층에서 읽혔다.

그는 노년의 글쓰기를 하산(下山)에 비유하면서 “내리막길을 품위 있게 내려오고 싶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신인 시절엔 쫓기는 심정으로 ‘허가받은 거짓말’을 지어냈었다”고 뒤돌아보면서 평소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노인들만 읽으라는 법이 있나요”라며 당당하게 노인들 이야기를 쓴 그가, 젊은 독자까지 사로잡았던 힘의 비결은 ‘언어의 동시대성’에 있었다.

소설가 이문열은 ‘작가의 정년을 여든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소설가 박경리는 ‘토지’를 완간한 뒤에도 일흔일곱 살까지 새 소설을 썼다. 그는 여든둘에 세상을 뜨기 두 달 전 시 세 편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어느 일간신문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며 “감각과 감수성은 젊은이들과 똑같다. 밤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예순에 소설 ‘레미제라블’을 펴내 인생 황혼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톨스토이는 일흔이 넘어서야 ‘부활’을 내놓았고 괴테는 여든둘에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도 지났다. 달갑지 않은 혹한이 유난히도 기승을 부렸던 겨울도 오는 봄은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실버문학도’들의 눈부신 활약도 한껏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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