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 울산’반세기 초석… 피땀흘렸던 모두가 영웅
‘공업 울산’반세기 초석… 피땀흘렸던 모두가 영웅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2.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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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용진 영남화학 전기부 근무자
피뢰침 공사 자원 30m 굴뚝 오르락내리락
공작실 작업 사고로 왼쪽 손가락 3개 잃어
열정·노력 다해 ‘오늘’ 만든 초기 근로자
크지않은 공로지만 조명 못 받아 아쉬움
방용진 영남화학 전기부 근무자.
1969년 5월 울산공업센터 건립 초창기 영남화학 공장건물은 4층 규모로 완성됐다. 건축물을 완공하고 나서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다. 피뢰침 공사를 잊은 것이다. 전기부 직원들에게 30m 높이의 굴뚝 위로 올라가 피뢰침을 달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안전시설이 부족했던 당시 자신 있게 굴뚝으로 올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때 강원도 영월에서 건설현장 공사 붐을 타고 이주해 온 방용진씨가 자원해서 굴뚝 위로 올라가겠다고 나섰다. 방씨는 사흘 동안 굴뚝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높이 3m의 피뢰침을 달았다. 당시 영남화학에 파견돼 근무하던 미국인들과 직원들은 모두 방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 건설공사 붐타고 울산에 둥지

울산공업센터가 지정된지 지난 3일 51주년이 지났다. 지난해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반세기 한국 산업을 이끌어온 많은 이들이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공단 초기 근로자들 상당부분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다.

방용진(86·중구 태화동)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65년 11월 울산의 건설 경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일가족과 함께 울산으로 이주했다. 방씨가 울산공단에서 처음 참가한 일은 한국비료 진입 교량공사였다. 당시 방씨의 시급은 60원이었다.

방씨는 “고향 영월에서 아내와 5명의 자식을 솔가해 먹고 살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와 낯선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성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일했다”며 “공단 초기에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한 모든 이들이 현재의 울산과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들”이라고 말했다.

방씨는 첫 일터에서 요령을 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 성실함이 인정받아 3개월간의 교량공사가 끝났을 때 영남화학 전기부에 채용됐다. 거기에서도 방씨는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고 피뢰침 공사에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신이 나섰다.

남구 매암동에 둥지를 틀고 가족의 안식처를 마련했던 방씨는 영남화학 사택 전화공사도 맡아서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방씨는 당시 영남화학 사택이 얼마나 훌륭한 시설이었는지에 대해 “미국인 직원과 한국인 직원 가족들이 공동으로 사용한 사택은 나무와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서구식 구조를 가졌다”며 “영빈관과 클럽하우스가 갖춰져 있어서 내방객들이 반드시 구경하고 갈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심지어는 미국인처럼 포크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 1967년 한국비료공장.

● 위험 감수 공단조성 위해 한몸

공단 조성 초기 한국비료 토지구획정리 때 일어났던 사건 한 토막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단부지 안의 당수나무를 제거하던 중장비 기사가 나무 아래 큰 바위를 만나 애를 먹었다. 바가지가 들어가지 않아 괴이쩍게 여긴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바위 밑을 살펴보니 구렁이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그 순간 바가지가 떨어져 기사도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방씨는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이 같은 사고의 재발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방씨가 울산공단에서 일을 할 때 그의 장남은 16살의 나이에 영남화학의 도로공사를 맡은 토건회사의 급사로 일을 했다. 그 후 부지조성 공사에 필요한 돌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는 일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타향살이를 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진학하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다. 방씨 일가는 대를 이어 울산공단 조성에 힘을 보탠 것이다.

공단에서 생긴 불행한 사건이 방씨에게 다가왔다. 피뢰침 공사를 하고 난 뒤 1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공작실에 들어와 전기 대패 위에서 그날의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공작실 밖의 스위치박스에서 전원을 올렸다. 순식간에 손이 빨려들어갔다. 그때 방씨는 왼쪽 손가락 3개를 잃었다. 그 사고로 회사에서는 2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공단 현장을 떠난 방씨는 보상금으로 자그마한 가게를 꾸렸다. 공단에서 일을 하는 장남과 함께 아들 2명을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그러나 방씨에게는 공단시절의 추억을 평생 잊지 못했고 매암동을 떠나지 않았다.

방씨는 “당시 여천천은 갈대밭이 무성했고 가물치가 둑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일만큼 물고기가 많았다”며 “여천천에서 바라보는 돋질산은 하나의 섬처럼 아름답게 보였고 주변의 배밭들에 꽃이 피면 마치 설국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 공단시절 우여곡절 평생 못잊어

가게를 꾸려 살아가던 방씨는 매암동에서 새마을 운동에 앞장섰다. 한참 공단이 활기를 띌 무렵 매암동의 주민들 중 거의 90% 이상이 공단 근로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했다.

또 매암동 새마을금고를 창설해 10년 이상 이사로 근무했다. 조합원 대부분이 공단 근로자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던 그는 울산에서 처음 둥지를 틀었던 매암동을 떠나야 했다. 공단이 확장되면서 이주를 해야만 했다. 방씨는 이주대책부위원장을 맡아 원활한 이주를 도왔다. 당시 매암동에서 시내로 이주해 온 가구는 모두 1천 세대 정도다. 지금은 태화동과 삼호동에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다.

방씨는 “이주하고 나서 비록 같은 지역에 다시 뭉쳐 살게 되긴 했지만 공단 조성 초기의 활발했던 마을 분위기는 일시에 가라앉았다”며 “도시로 나와서 성공한 사람보다는 기운이 빠지고 실패한 사람들이 더 많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방용진씨는 독립유공자 방재구의 아들이다. 이 공로는 훗날 인정돼 2005년에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본인은 6·25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이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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