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7 신상(神像)조각 ③
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7 신상(神像)조각 ③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0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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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성현 중에 보통 예수 탄신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석가는 예수보다 550여년 먼저이고 공자도 250여년이나 앞선다.

인구증가에 따라 부족을 넘어선 국가체제는 수렵 채취 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었다. 달력과 관개 수리 등은 물론이고, 가뭄 홍수의 재해와 전쟁을 피하고 풍작을 내는 데는 신의 도움이 더한층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원시신앙은 국가의 토속적 민속신앙이 되어서 생활양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상도는 기후가 온화하며, 계절 기온의 편차가 적고 사방에 강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지역이어서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사다난한 집단사회가 되었다. 그러한 집단생활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생(生)의 미련과 사(死)의 공포와 인(仁)의 희망을 기원하는 토속신앙의 근원지가 경주이다.

울산시민도 많이 찾는 경주 남산이나 남천에서는 불교나 유교도 아니고 기독교는 더욱 아닌 민속신앙을 지금도 행한다. 필자는 경주출신 김동리(金東里)와 박목월(朴木月)의 문학세계가 이러한 민속신앙의 토속성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6C 중반 신라 중기 법흥왕 때의 이차돈 순교는 신라토속의 민속신앙이 종교화 되는 과정을 말한다. 왕궁에서 잘려진 이차돈 머리가 날아가서 소금강산의 백률사 절터로 자리했고, 목에서는 흰 피(血)가 뿜어 나왔다. 신라는 이러한 종교적 이벤트로 해서 불교국가를 이룩했으나 고구려와 백제에는 이미 불교가 전래돼 있었다.

종교의 신앙심은 국가의 크고 작은 문제뿐만 아니라 안보와 국민의 생활양식을 좌우했다. 삼국에서 가장 열세한 소국이었던 신라는 더욱 불교의 힘을 빌려 안보에 이용했다. 현 불국사의 10배 규모로 확증된 황룡사가 안보 차원의 종교물이고, 당시의 불국사도 그러한 맥락에서 축조된 조형물이었다.

우리의 조형물은 거의 1천 번의 외침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에 소진, 소멸 됐고 탈취 당했다. 그 와중에도 석굴암,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적잖은 유산문화재가 건재하였음은 역시 부처님의 은덕인가? 이마저도 없었다면 우리민족은 무엇으로 세계인에게 얼굴을 내 밀수 있겠는가?

문명의 과학기술도 문화의 정신토양에서 배양된다. 막강한 무력의 징기스칸은 중국에 원(元)을 창건했으나 유목 몽골은 정체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100년 만에 퇴출당해 마침내 중국에 배속되었다. 세계의 문화 중심으로 자부하는 중화(中華)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여 미국의 과학기술도 능가할 것이다. 인도는 어떠한가? 중동 이슬람은 왜 초강대국과 대결 하는가? 이 모두가 문화 배경의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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