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하장
마지막 연하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1.1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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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중순. 희비가 엇갈렸던 임진년의 고단한 일정들이 서서히 마무리 수순을 밟아 가던 무렵, 이른 아침부터 잿빛 하늘은 차가운 겨울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두통을 동반한 감기 기운에 잠을 설친 데다 잠깐씩 든 잠 속에서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잡다한 꿈 때문에 출근하는 내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뭔가 모르게 불안하고 찜찜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 편집회의를 짧게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커피를 생략한 채 두통약부터 챙겨야 했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고교 동창회 총무였다. ‘무슨 일일까? 아침부터…’ 나는 의아한 마음을 가누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친구야, OO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데. 강남OO병원 중환자실에 있는데 의식이 없단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한동안 멍해 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2주 주 전 송년모임에서도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아끼지 않으며 분위기를 한껏 달구었던 친구 아니던가. 게다가 등산이다 수영이다, 건강관리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쏟았던 친구 아니던가. 나는 우선 시급한 업무만 서둘러 처리한 뒤 친구가 사경을 헤맨다는 그 병원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중환자실에 도착해 순서를 기다린 뒤 친구가 누워 있는 침상 앞으로 다가가 보니 전해 들은 대로 친구는 의식을 잃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뇌가 이미 반쯤 죽은 상태라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친구의 아내가 넋 나간 사람처럼 멍 하니,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의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가 없음을 알아 갈 때쯤 면회 시간이 종료되고 나는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에 만족해야 했다.

그로부터 초조한 나날이 열흘쯤 흘렀을까. 나는 총무로부터 마침내 비통한 문자메시지를 받고야 말았다. 앞으로 100세를 산다는 이 시대에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친구는,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 가장 소중하게 아끼던, 아직 출가하지도 않은 두 딸을 남겨 두고 훌쩍 떠나 버렸다.

착잡한 심정을 가누며 하나 둘 빈소로 모여든 동창들은 서로 바라보기도 민망한 듯 조용히 쓴 소주만 털어 넣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보내려던, 미처 부치지 못한 연하장에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인사말을 적어 넣은 뒤 영원한 작별의 의식을 마무리했다. ‘8899’. 자신의 이메일 주소에 포함된 아라비아 숫자의 의미처럼 ‘팔팔하게 99세’까지 살기를 희망했던 친구는 아직 이루지 못한 많은 꿈들이 채 영글기도 전에 허무하게 떠나 버린 것이다.

막상 절친했던 친구를,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보내고 나니 한동안은 인생의 덧없음에 그저 허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을 위안 삼으며 애써 되뇌자 마음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족들이 고인(故人)의 장기기증에 뜻을 함께함으로써, 꺼져가는 누군가의 생명을 되살렸다는 소식에 한동안 가슴 뭉클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늦은 밤, 빈소를 떠나오며 문득 몇 해 전 읽은 ‘인생수업’이 떠올랐다. 20세기 가장 훌륭한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책으로, 그녀가 말년에 이르러 온몸이 마비되며 죽음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실된 것인가를 고민한 내용이다. 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말기 암 환자들을 인터뷰해 그들이 들려준 진솔된 표현 속에서 꼭 배워야 할 내용들을 정리한 것인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야말로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삶의 교사들이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저자는, 누구나 죽음을 마주하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이 깨달음은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두려움, 용서에 대한 깨달음이자 사랑과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라 일러준다. 따라서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꼭 삶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살아 있는 순간, 그 깨달음을 얻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구절도 아주 또렷이 떠올랐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할 것을 지금 하라’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가, 만약 떠날 때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무엇을 꼭 이루어 놓고 가려 노력했을까. 매서운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평화롭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훌쩍 떠난, 그리운 친구의 명복을 다시 빌어 드린다.

김부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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