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나온 날을 묻자 초로의 신사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듯 희미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굵은 손마디와 굳은 살, 안경너머 시종 떨리는 눈동자까지…. 쉰 목소리를 타고 고됐지만 보람된 추억이 오롯이 전해졌다.
페인트 가루가 잘 지워지도록 얼굴에 ‘콜드 크림’을 달고 살았다는 그.
올해 울산 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앞두고 인터뷰 한 현대차 초창기 근로자 박욱배(72, 지난 11월 28일자 7면 보도) 선생에 대한 짤막한 기억이다.
얼마 전 박 선생을 소개해 준 지인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권 기자, 박욱배씨 몇 달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신 것 모르죠? 내가 이야기를 한다는게 참.”
공업센터50주년 기념책자에 실린 박 선생의 이야기를 다시 신문에 소개한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문득 인터뷰를 하면서 봤던 그의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오순도순 대가족 사이에 그의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 먼저 세상을 떳는데…” 회한섞인 말이 돌아왔다. “번듯한 옷 한 벌 못사줬다”는 말에 마음이 더욱 아렸다.
그의 이야기는 삶의 한 단편이지만 많은 이에게 보석같은 선물이 됐을 것이다. 유족에게도 ‘슬픔’보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길 바란다. 그에 대한 기억이 화석처럼 남을 것 같다.
울산 공업센터 50주년이 20여일 앞이면 한 해를 덧입는다. 희생에 대한 깊은 감사와 미래에 대한 새 의지가 맞닿는 계절이다.
이 글에서는 고인의 이름 앞에 마지막을 의미하는 고(故)자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가 ‘산업화의 아버지’를 잊지말자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