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만님과의 동강병원 건설인연은 조금 길다. 1970년대 최성만님이 당시 태화동 사무장으로서 새마을 운동 실천 책임자로 일할 때, 마침 동강병원이 터 닦기를 하고 있었다. 돌산을 깎아 건물을 지으려니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는데, 태화동 주민들, 특히 불량기 있는 젊은 사람들이 데모를 하고, 선량한 동네 사람들 선동하여 원성 아닌 원성이 많아 공사 진척에 애로가 많았다. 당시 시장, 서장, 동장 등등의 행정 책임자들도 힘들어 하던 주민들의 설득에, 주민들의 단합에 최성만님이 나섰다. 당시에는 병원이 혐오시설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것을 순리로 풀어서 최초로 주민 단합을 이끌어냈다. 지금 보이는 동강병원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주민의 코에는 거슬렸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려서 병원에 갔다가 소독약 냄새를 맡고서, ‘왜놈 냄새를 맡기 싫으니 그냥 집에 가자’고 해서 치료도 받지 않고 집에 갔다고 반일 사상(反日 思想) 교육에 병원을 끼워 넣던 시절이었다.
최 사무장이 우선 리더 급의 청년들을 말로서 설득하고, 때로는 힘으로 제압하여 말썽피우기를 수그려 뜨렷다. 최성만님은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파 축구선수이다. 하여간 병원이 들어서면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 확실하게 비교해주었다. 아울러 돌산을 깎으며 발파작업을 할 때 생기는 진동으로 벽에 금이 가고, 때로는 돌맹이까지 날아들어 지붕이 망가지고의 피해보상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주민들의 불평을 해소시켰다. 당시 논 한 평(3.3㎡)에 500원 할 때, 60만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보상비로 지불하였다. 당시 울산의 인구가 10만 안팎이었다.
이런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동강 선생은 수년 전까지 지인들과 함께 경주의 산내면 전원일기를 찾으셨다. 공기 좋고, 사람 좋아(최성만님),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고 껄껄 웃으셨다.
동강 선생은 최성만님이 부탁한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비, 입원비 등등을 받지 않고, 최성만님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퇴원 시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 말을 할 때 최성만님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어떤 사람을 꼭 만나서 더 좋은 이야기를 수집하라고 당부하신다. / 글 박해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