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근로자 흘린땀 거울삼아
사회적 책임갖고 노사상생 보여줘야
초창기 근로자 흘린땀 거울삼아
사회적 책임갖고 노사상생 보여줘야
  • 권승혁 기자
  • 승인 2012.11.27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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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욱배 前 현대자동차 초기 근무자
▲ 박욱배 전 현대자동차 초기 근무자.
철야근무의 연속이었다. 하루 12시간은 기본이었다.

작업을 하고 나오면 얼굴은 온통 페인트 범벅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박욱배씨는 25년간 현대자동차 도장공으로 있던 시절을 회상하자 그 때의 일이 불과 어제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공장 설립 초기에는 어땠느냐는 질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듯,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의 표현이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한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현대자동차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박씨 같은 초창기 근로자들이 흘린 땀에 대해 미사여구를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의 쉰듯하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에는 그가 쌓은 연륜과 세월의 울림이 느껴졌다.



● 페인트가루 범벅 콜드크림 달고 살아



“부품이 밀어닥치는 날은 집에 갈 생각을 못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돈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페인트 가루를 뒤집어쓰며 작업을 했습니다. 2시간 단위로 일을 했는데, 페인트 가루가 잘 닦이도록 늘 콜드크림을 달고 살았지요.”

지금은 그 일을 로봇이 대신하는 자동화 공정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모든 작업이 사람 손으로 이뤄졌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일을 한다는 자체가 좋았다. 지역에서 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 대우도 괜찮았다. 시급 105원. 한 달 동안 일하면 철야작업에 따라 2만원 내지 3만원 가까이 급여를 받았다. 월세가 1천500원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1973년 그가 갓 입사했을 당시 현대차 울산공장에는 1공장(현 4공장 자리)한 곳밖에 없었다. 근로자도 약 1천500명에 불과했다. 현재 울산공장(495만㎡)은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 생산공장과 엔진변속기공장·시트공장·소재공장이 있고 거기에 대형 자동차운반선 3척을 동시에 접안 할 수 있는 전용부두까지 갖춰 명실공히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단일 생산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박씨가 다닐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모를 이뤘다.



● 첫 고유모델 포니 수출, 최고의 추억

▲ 선적중인 현대자동차 포니(1976).포니자동차 생산라인(1975).


그는 현대자동차의 첫 고유모델인 포니를 수출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존에 코티나 같은 중형차를 만들다가 작은 포니를 보니 조랑말처럼 깜찍하고 날렵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실 ‘이 차가 과연 고객들한테 어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는데, 막상 우리 손으로 만든 차가 수출된다고 하니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조랑말이란 뜻의 포니는 헤치백 형태의 후륜구동 소형차다. 포니는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팔리며 해외시장에 한국과 현대를 알린 첫 차였다. 현대 소형차에 아직도 역사적 기원으로 남아있는 포니는 지금의 현대와 한국 자동차산업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공장내 분위기는 마치 군대와 같았다. 부장급 이상 임원에게는 거수경례를 했다. 작업장내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뚜렷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면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 차장급 상사에게도 우렁차게 경례를 하는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조장, 반장의 말이 곧 법이었죠. 요즘도 공장을 한 번씩 방문하면 후배들이 ‘옛날에 형님 정말 무서웠는데…’라며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동료와의 우애는 돈독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탓에 저마다 개성이 넘쳤지만 근로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류의식이 존재했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70년대 초 울산에는 아파트라고 부를만한 게 없었습니다. 대부분 현대차 근로자들이 염포, 양정 쪽에서 셋방살이를 하거나 단칸방에 살았지요. 뻔히 다 아는 처지다 보니 근로자 가족끼리도 참 소박하고 돈독하게 지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해졌지만 초창기에는 엄격한 직장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 아껴주는 문화가 있었기에 형, 동생하며 힘든 일도 도와가며 이겨낼 수 있었지요.”

박씨는 그간 현대차의 불안한 노사관계라든지, 근로자들의 사이버도박 파문 등을 접하며 아픈 가슴을 다스려야 했다고 말했다.

“노사간 갈등이나 직원들의 불미스런 일들 모두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차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큰 것은 국민 모두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노사 모두 이런 점을 잊지 말고 사회적인 책임을 갖고 상생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후배들도 자신의 일에 좀 더 소명의식을 갖고, 후배들의 앞길을 비춰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세계적 회사 다녔다는 사실 자랑스러워



그는 수십 년 동안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승용차는 퇴직 때인 1998년에야 장만했다. 바로 자신이 만들던 ‘엑센트’였다.

“수십 년간 일 할 때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죠. 하지만 자가용을 구입하고 나니 막상 혼자서는 갈 데도 별로 없더군요. 허허.”

그의 작은 아파트 큼지막한 가족사진에는 지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어느새 장성한 자녀들은 출가해 오순도순 가정을 꾸렸다. 사진 속의 그는 웃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노신사의 얼굴은 쓸쓸했다. 퇴직도 하기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 생각에서다.

“공장에 다니면서 어쩌다 쉬는 일요일 주말이면 거의 집에서 녹초가 됐습니다. 시간이 좀 날 때면 동료들과 모여서 약주 한 잔으로 피곤을 달랬지요. 가족과의 시간은…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군요. 제대로 된 옷 한 벌 못해줬는데….”

박씨는 마지막으로 울산공업센터 지정 반세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퇴직 때만해도 회사의 경영목표가 글로벌 톱 10에 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글로벌 톱 5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무척 뿌듯함을 느낍니다. 모든 게 선후배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결실이겠지요. 그저 내 가족이 잘 살자고 열심히 일한 게 회사의 발전에도 도움이 됐다면 정말 더 바랄게 없습니다. 세계적인 회사에 몸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랑스럽고 긍지를 가집니다.”

권승혁 기자 gsh@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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