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 제재·주제·양식은 모든 한국학 연구의 출발점
암각화 제재·주제·양식은 모든 한국학 연구의 출발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1.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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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암각화. 그것은 한반도의 동남쪽 끝 울산 앞바다와 그 인근 지역에서 문명의 여명기를 개척했던 이 땅의 선주민들, 즉 우리의 가장 오래된 조상들이 야생의 들과 산 그리고 거친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였던 고래를 비롯한 동물들과 그것들을 포획하기 위하여 펼쳤던 갖가지 시도 그리고 그들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제작했던 각종 생활이기 등 당대 문명의 편린들을 대곡리 ‘건너각단’의 바위표면에 조형 언어의 형식으로 번역하여 놓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암각화 속에 형상화된 각종 제재와 주제 그리고 양식 등은 한반도의 어떤 조형 예술품보다도 오래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은 한민족 문명사의 서막을 장식한 원초적인 이미지이다.

그런 점에서,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은 조형 예술의 형식으로 응축시킨 한국 민족 문화의 원형질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한국학 연구자들은 이 암각화를 그들의 학문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선사시대 한반도의 자연 환경과 인문 지리, 동물학, 선사 시대의 경제활동과 공업기술, 종교와 의례의 모습 그리고 조형 예술의 제반 문제 등 어느 한 분야도 이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암각화 속에 각인된 하나하나의 형상들은 선사 시대 대곡리의 사람들이 직접 보았고 또 만들어 썼던 도구들이었으며, 실제 생활 속에서 체험했던 온갖 종류의 경험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 울산을 넘어 한국인의 ‘始原’



한반도 최고(最古)의 문화인들이 걸어 온 문명화의 첫걸음과 일상들이 이 암각화 속에 고스란히 각인돼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대곡리 암각화를 제작한 집단이 그들의 눈에 비친 물상들을 그린 것인데, 그것은 물상들의 껍데기를 무의미하게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니다.

형상 하나하나는 소위 ‘시원(始原)’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것들 속에서 선사 시대 울산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녹아 있는 원형에 대한 관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작 집단은 그 속에 시각 세계의 구조와 물상들에 대한 그들의 변별 방법과 분류, 세계(cosmos)의 원상에 대한 관념, 형상을 통해서 구축한 상징 및 정보 공유 체계 그리고 미감 등을 동시에 복합적으로 투영시켜 놓은 것이다.

그동안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을 통해서 선사 미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위그림 유적지와 형상들 가운데서 살펴지는 몇 가지 일반적인 현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위그림이 공간적으로 어떠한 장소에 그려지는가의 문제, 형상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며 차례로 덧그려져 있는 점, 양식의 정형화와 해체의 과정을 살피게 하는 점, 제작 주체의 생업과 당시에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물질문화의 발전 단계를 살필 수 있는 점 등이다.

이와 같은 점들은 세계의 선사 시대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살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다.



● 대곡리 집단의 뛰어난 관찰력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270여점의 형상들이 표현돼 있다. 이렇듯, 무려 270여개라는 적지 않은 수의 형상들이 하나의 바위 표면 가운데 그려진 유적도 세계적으로 그다지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형상들을 통해서 대곡리 암각화 제작 집단의 동물 등 제재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각 방법과 인식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그것은 표현 대상물의 포착한 시점, 유와 종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해 낸 점 그리고 각각의 제재들이 띠고 있는 형태적 속성 등을 분명하게 이미지화 시킨 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암각화 속에는 모두 60여 마리의 고래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 중에는 분기공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의 모양도 그려져 있고 또 꼬리자루를 비틀며 크게 요동치는 모습도 살필 수 있다.

그밖에도 각각의 고래 형상들은 입의 구조, 가슴지느러미의 위치와 생김새, 꼬리지느러미의 모양 등이 서로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로써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고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떤 고래를 형상화한 것이며 또 어떤 순간을 포착한 것인지 읽어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을 통해서 우리들은 대곡리 암각화 제작 집단의 뛰어난 관찰안과 표현력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암각화 속에 표현된 형상들은 제재적으로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대비돼 있다. 하나는 바다동물인 고래들이고 다른 하나는 육지동물이다.

바다동물은 주로 수직의 축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머리는 대부분 위로 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중심 암면의 왼쪽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 후자인 육지동물은 수평의 축으로 구성돼 있고, 그것들의 운동방향은 오른쪽이다. 물론 육지동물은 오른쪽 암면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

따라서 시각적으로는 바다동물이 수직운동을, 육지동물은 수평운동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제재들은 그것들의 형태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제시돼 있는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대곡리의 화가들은 제재에 따라서 포착 관점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다동물들은 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 즉 배면관(背面觀)의 지각 방식이 지켜지고 있고, 육지동물들은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側面觀)으로 그려져 있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도 특히 이 암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고래잡이 광경이다.

암면의 중간 부분에는 두 척의 배가 협동하여 고래를 잡으려 하고 있는데, 그 뱃머리에는 작살자비가 이제라도 막 작살을 던지려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넘실대는 파도를 헤치며 어부들이 고래와 거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또 암면의 한 쪽에는 이미 죽은 고래를 끌고 가는 장면도 형상화돼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들은 모두 이 암각화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점으로써 대곡리의 ‘건너각단’을 성소로 삼았던 최초의 사람들은 고래잡이 어부들이었음도 알 수 있게 됐다.



● 각종 고고학적 성과가 뒷받침



그동안, 대곡리 암각화 속의 형상들이 제작 시기를 논증하는 데 필요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도 하나 둘씩 축적돼 왔다.

동삼동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 표면에는 사슴이 시문돼 있었고, 그것은 이 암각화의 사슴 형상들과 양식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또 같은 유적의 토기 표면에는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만들어 썼던 그물이 찍혀져 있었다.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가 발견됐으며, 울산 장생포에서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발견됐다. 그밖에도 울산 신암리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여성 비너스상이 출토됐고, 통영 욕지도에서는 멧돼지 소상이 출토되기도 했다. 보다 더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층에서는 고래 형상을 만든 거푸집도 확인됐다.

이와 같은 발굴 사례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술과 문화적 발달 단계에 대한 기존의 편견들을 불식시키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줬다.

그런데 위에서 예로 든 대부분의 유물들은 대곡리 암각화 속에 선명하게 표현된 핵심적인 제재이자 당시의 문명 상황을 살피게 해 주는 표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이 암각화를 제작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물이나 작살 그리고 고래잡이 배 등이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적인 생활용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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