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호국정신의 뿌리 신흥사
울산 호국정신의 뿌리 신흥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1.04 1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흥사는 울산 북구 대안동 동대산에 안겨 있다. 이 절집은 서기 635년 창건된뒤 울산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아 낸 승병을 최초로 훈련시켰다. 신흥사는 그로부터 울산인의 호국충정의 뿌리가 됐으니, 그 정신은 임진란과 일제 항일투쟁까지 이어졌다.

1400년 가까이 이어진 이 정신의 근본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서기 520년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해 서라벌 왕경을 둘러싸고 있는 6부 6촌의 토착세력의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뒤 법흥왕은 토착 세력과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신하 이차돈을 앞세워 기이한 일을 벌임과 동시에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절대평등사상을 내세워 불교를 승인하면서 국민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뒷면에는 호족들이 전통신앙체로 엮어진 힘의 균형을 깨트리면서 정치를 중앙집권제로 일원화해 모든 권력은 임금으로부터 나오도록 하는 권력 이양의 수순을 밟는 과정이 있었다. 그로부터 또 1년뒤 모례의 집을 출발하여 파급된 불교도 세력에 러브콜을 보내면서 묵호자를 앞세워 경북 구미 태조산 자락에 도리사를 창건했다.

100여 년이 지나고, 635년 선덕여왕이 즉위한지 4년이 되는 해에 명랑조사(明朗祖師)가 발원하여 울산 북구 대안동 동대산(東大山 445m) 자락에 세운절이 신흥사(新興寺)다.

원효(元曉 617~686년) 스님이 경주 함월산 아래 임정암(林井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보니, 이곳은 인도의 광유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계림국에 온 범마라국 사라수왕의 아들이 세웠음을 확인한다. 스님은 이 암자를 중창해 기림사(祈林寺)라 이름을 고치는데, 부처님이 큰 깨우침을 얻을 당시 계셨던 인도 최초의 절집인 기원정사에서 ‘기’자를 따오고 임정사에서 ‘임’자를 가져와서 ‘기림사라고 지었다. 이즈음 광유가 직접 동굴을 파서 골굴암도 지었다고 전해온다.

668년이 되니 제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그 기운을 살려, 인공연못인 안압지를 완성하여 신라의 위상을 더 높였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만파식적 이야기를 퍼트려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왕은 자나 깨나 죽으나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으며, 삼국을 통일 시킨 이후에도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678년에 이르러 왕은 마침내 신흥사 스님들에게 무술훈련을 시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기를 주문한다. 이 절집은 이후 동해안을 지키는 첨병으로서 승병을 배출했으며 지금도 그 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있다. 명랑조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건흥사(建興寺)라 하였으니,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겼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679년에야 비로소 호국사찰로 알려진 경주 사천왕사가 완공되었다. 681년 신문왕 때 완공을 본 감은사는 아버지 문무왕이 계획을 세울 때는 진국사(鎭國寺)라는 이름이었다. 진압할 진(鎭)에서 살필수 있듯이 나라에 출몰하는 외부의 적을 막기위해 세운 절이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두고 왕이 붕어하니, 다음 해 아들 왕이 부왕의 그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라고 개칭하였다.

다시 동대산 신흥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절집은 임진전쟁 당시에도 승병이 봉기한 절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 절의 지운(智雲) 스님은 승병 백여명과 기박산성에서 합세한 의병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정유년에 다시 일본군이 일으킨 도산성전투에서 초토화된 조명연합군이 경주로 후퇴할 때, 이 절집은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거의가 소진됐다. 명맥만 간신히 유지해오던 절은 1991년경부터 복원되면서 절집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덕여왕은 동해안으로부터 침입하는 외부의 적을 막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신흥사를 세웠으며,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은 그 절집에서 신라 최초의 승병을 육성했다. 임진란때는 승병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바쳤다.

그 뿌리가 어디 가겠는가?

근대에 와선 신흥사 뒷산 너머에 살던 광복군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비롯해 최현배 선생의 형제분의 독립운동, 그리고 병영의 독립만세운동이 다 그 뿌리에 연원을 둔 것이다.

신흥사는 울산인의 호국충정의 정신적 주춧돌인 것이다.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