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사생결단 하는 이상한 선거
과거와 사생결단 하는 이상한 선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0.2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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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봉우리에서 출발한 가을이 슬금슬금 들판을 가로질러 와 어느덧 거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저녁에는 옷깃을 추스르게 하고 찬이슬 젖은 아침 나들이에는 걸칠 입성을 뒤적이게 할 정도다. 어느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마음 산란한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이제 60일 방점을 찍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예상했던 대로 이른바 빅 이슈가 없는 선거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갈 때 가더라도 우선 던져놓고 보자는 식의 판을 뒤흔들만한 충격적인 이슈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초반에 제기되었던 복지논쟁이나 경제민주화 같은 첨예한 다툼거리도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죽은 과거가 되살아 나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이러다간 정책다툼은 없고 네가티브만 존재하는 선거가 되기 십상이다.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에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공명이 죽은 후에 벌어지는 전투에서 공명의 이름과 지혜를 빌어 이긴다는 내용이다. 과거의 명성과 지혜가 현재의 교훈이 된다는 역설이다. 올해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등장한 삼국지 명장면의 짝퉁은 NLL과 정수(正修)장학회 싸움이다. NLL 다툼의 요지는 이렇다. 2007년 죽은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인 NLL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것에 불과하니 포기하겠다는 취지의 뜻을 밝혔고, 그 당시 현재의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회담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청와대 비서실장이란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 새누리당의 요구다. 반면에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 측은 ‘실제로 노대통령이 그런 취지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 정상회담 녹취록에 있다고 하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열세를 만회하기위한 정략적 구태인 또 다른 색깔론이다. 만약 사실이 아니면 박근혜 후보가 책임을 지는 조건하에 공개하자’며 버티는 중이다. 민주당이 말하는 ‘박근혜 후보의 책임’이 후보사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NLL은 한국전쟁 정전회담 직후인 1953년 8월 30일 설정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서해 5도를 포함한 구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고, 북한 또한 이를 기점으로 서해의 경계를 지금까지 묵시적으로 인정해 왔다. 그렇게 해서 NLL이 서해의 대북 방위선이 된 것이다. 새누리당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NLL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영토 포기이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후보가 대통령의 직을 수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결국 후보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아니라 문재인 후보의 NLL에 대한 가치인식이 전면에 등장한 셈이다.

정수장학회는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 소위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당시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 문화방송 등에 지분을 가지고 있던 고 김지태씨 소유의 부일장학회가 재산헌납 과정을 거쳐 5·16장학회로 바뀌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가 5·16장학회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 1982년 전두환 정권 당시 박정희, 육영수의 머리글자를 따서 정수장학회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를 포함해 현재 약 238억 6천여만원의 자산을 가진 장학 목적의 재단법인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재산 헌납과정에 당시 중앙정보부의 강박이 있었느냐이다. 비록 시효가 지났고 그 활동이 공익적인 목적에 부합한다고 해도 박근혜 후보가 관여해 왔고 지금도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게 반대 측의 입장이다. 결국 박 후보의 도덕성 문제다. 따라서 지금까지 법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해온 박 후보의 태도가 변하면 곧 수그러들 문제이다. 하지만 일련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헌법가치를 훼손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상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이 되려는 박 후보로서는 일단 스텝이 엉긴 셈이다. 따라서 박정희의 강탈 여부가 아니라 이에 대한 박근혜의 인식이 더 중요하게 됐다.

두 가지 문제의 핵심 중 하나는 안보와 이념이고 하나는 사유재산 보호와 도덕성 문제다. 공통점은 둘 다 헌법적 가치의 문제이며 대통령자격의 핵심 요건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가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과 연관돼 있다. 죽은 자를 빌미로 산 자를 이기려는 정치, 죽은 과거에 우리가 살아 갈 미래의 목을 거는 이상한 대통령선거에서 무슨 내일의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신명도 없고 비전도 안 보이는 선거판을 쫓아가고 있는 중이다.

<박기태 전 경주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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