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잘사는 나라위해 열정 쏟아
농민 잘사는 나라위해 열정 쏟아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10.16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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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건 前한국비료 사장
▲ 성평건 前한국비료 사장.
“저는 한국비료가 대한민국 농가의 생산성을 높여 농민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를 건설한 것은 농업 자립화를 이루는데 기업이 일조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입니다.”

성평건(70)씨는 1965년 한국비료에 입사해서 CEO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성씨는 한국비료의 창업사원인 셈이다. 사원에서 출발해 사장에까지 올랐으니 한국비료와 삼성그룹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 한국비료 창업사원에서 CEO까지 올라



한국비료에 입사해서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암모니아과였다. 당시의 기업 사정은 창업사원을 모집하는 단계라 입사하면서 바로 주무사원 역할을 했다.

주무사원은 해당 부서에서 실무 핵심 역할을 하는 보직이다. 그러나 막상 주무사원이라고 했지만 비료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잘 알지 못한 상태라 충주비료, 나주비료 공장을 찾아가서 연수를 받았다. 또 한국비료 공장 설계를 맡은 일본 ‘토요엔지니어링사’도 방문해 공장 설계와 관련된 공부도 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선진 비료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비료는 초창기에 대부분의 설비를 일본에서 도입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으로도 건너갔다. 영국 ICI사가 암모니아공장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이 회사에 파견돼 1년 동안 연수를 받았다. 거기서 배운 선진 기술은 많은 도움이 됐다.

한국비료는 호암 이병철 회장의 숙원사업이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에게 울산공업센터를 건의하면서 비료공장을 지어 한국의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약속까지 한 터였다. 그래서 부지도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35만평을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병철 회장의 농민사랑은 대단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다른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사원들에게 하루 1천t을 생산하는 동양에서 가장 큰 비료 공장을 우리가 짓자고 독려했습니다. 숙원사업이다 보니 부산의 제일제당 공장 직원 등 그룹 관계사 임직원들이 동원돼 땅 파고 벽돌을 나르는 단순 작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비료는 이병철 회장의 민족사랑을 잘 표현한 기업이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공장건설 현장에 자주 방문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한국비료의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공장이 건설될 당시에는 거의 현장에 머물렀다. 그만큼 이병철 회장의 비료공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했다는 증거다.당시 한국비료 건설에 참여했던 회사 가운데 하나가 현대건설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현장에서 이병철 회장에게 직접 공사 진척도를 설명하기도 했다. 울산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발전을 이끈 두 사람의 거목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공장을 울산에 건설한 것은 이런 인연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한국 경제사에 걸출한 인물이었고 선의의 경쟁을 하셨던 분들로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제가 되기도 했을 겁니다.”



● 이병철 회장 농민사랑·민족정신 투영

▲ 1967년 4월 20일 한국비료 준공식에서 故 이병철 회장의 연설 모습.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공장건설 재원 마련을 위해 그야말로 동분서주 했다. 미국, 일본을 직접 오가면서 상업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고 외자도입 관련 실무업무를 맡고 있는 공무원들을 직접 찾아가 공장건설의 필요성에 대해서 여러번 역설했다.

한국비료는 이병철 회장의 이런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울산공단 조성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성씨의 주장이다.

“어쨌든 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완공된 한국비료는 우리나라의 농업선진화에 기여했음은 물론 산업화를 앞당기는데도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벽돌을 하나 쌓았다는 자부심,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병철 회장을 중심으로 삼성 임직원들이 하나가 돼서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는 등의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아마도 울산에 삼성의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건설됐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입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비료공장으로 끝을 볼 생각이 아니었다. 한국비료의 성공의 여세를 몰아 기업의 규모를 석유화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싶어했다. 콤비나트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런 이병철 회장의 꿈은 그가 사망한 뒤 충남 대산석유화학단지에서 이뤄졌다. 이 일은 서해안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성씨는 이후 삼성 반도체의 초대 사업본부장을 역임했고 삼성종합화학 초대 사장, 삼성 BP 사장까지 지내 삼성의 중요한 계열사의 CEO를 두루 거쳤다. 삼성 BP 사장으로 역임하던 1992년부터 94년까지 다시 울산에 내려와 울산생활을 했다.

“제 고향은 삼천포입니다. 그러나 울산은 순수한 청년의 열정을 바친 곳이므로 저에게는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이 좋아 일에 몰두했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 발전을 이뤄갔기 때문에 울산에서의 생활은 제 인생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틈이 나면 울산 근교에 수석 탐사를 위해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울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도시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석 탐사를 위해 주로 바다를 많이 다녔다. 당시의 울산바다는 순수한 해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공단에게 많은 부분을 내줬지만 울산의 바다는 세계 어느 바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 청년 순수 열정 바친 제2의 고향

▲ 한국비료 울산공장 공사장 안내간판.


공업센터 50주년을 맞아 초창기 울산의 발전에 기여했던 사람으로 남다른 소회가 있다. 그리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선배로 현재의 울산시민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도 전했다.

“저는 울산에서 가장 순수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울산에서 창업주의 이념과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인지했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자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인생의 목표가 다르겠지만 확고한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그러한 노력이 국가 전체 발전의 밀알이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앞으로 30년은 더 연구하고 노력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활용하는 비즈니스다.

“울산에 대한 그리움은 늘 있습니다. 간혹 틈이 나면 울산을 방문하지만 앞으로는 더 자주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50년이 지난 세월 울산은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지만 저의 청춘이 묻혀있기 때문에 여전히 제게는 정겨운 도시입니다.”

성평건씨는 우리나라 공업발전은 물론 농업의 선진화를 이룬 현장에서 순수한 열정을 바쳤고 아직도 청춘의 열정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이상문 기자 iou@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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