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귀양지에서 전시회 가진 화가 강세황
손자 귀양지에서 전시회 가진 화가 강세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0.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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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 문인화의 세계’에 전시된 작품 152점 중에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년~1791년)이 그린 그림 4점과 겸재 정선의 백납병풍에 대한 그의 발문 1점이 전시되고 있다. 표암은 후기 조선시대를 풍미한 화가이면서 문인이고, 평론가로서 시·서·화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서 당시 화단을 이끌어 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울산군 두서면 내와리 탑골로 귀양 온 천주교인 강이문(姜彛文)은 표암의 손자이다. 1801년 신유박해때 이문이 천주학 신자로서 백운산 자락으로 귀양을 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형인 이천(姜彛天 1768~1801)을 따라 서학인 천주교를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이천은 청나라 출신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1752년 쑤저우(蘇州) 출생~1801년 서울에서 처형됨)에게 교리를 배웠는데, 1797년 당시 함께 천주학을 배운 이들 중에는 노론 명문가의 자손 김건순 등이 있었으며, 이천은 그해 11월 혹세무민죄(惑世誣民罪)로 제주도에 유배된다.

1785년 정약용 형제가 연루된 저 유명한 을사주초사건으로 천주교인 김범우가 정기적 집회를 가졌다는 죄목으로 밀양 단장면에 귀양왔다. 1791년 신해년 정조 임금 재위 15년에 전라도 진산군(오늘날의 충청남도 대전시)에 사는 양반 윤지충(尹持忠)이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불사르고 유교식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되는 진산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보는 집권세력은 당시 창궐한 정감록과 천주교를 같은 선상에서 결부시켜 조선 정부의 국시인 성리학을 뿌리째 부정하는 반체제의 성격을 띤 종교 단체로 규정짓게 된다.

참고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윤지충의 증조할아버지가 공재 윤두서이며, 현조인 5대조가 고산 윤선도이다. 그는 한국 가톨릭 순교자 124위 중 첫 번째 순교자로 올라있다. 주문모 신부가 1794년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전교활동을 하는 동안 정조 임금이 천주교를 표면적으로는 탄압하지 않음에 따라 교세는 확장되어 갔다.

당시 성리학이란 예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는 예학(禮學)이 학문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예의 정신은 불변해야 하며, 이에 따라 양반은 양반으로서 아래 사람은 양반에게 그 예를 다한다는 사대부 중심의 이념에 반하여, 당시 천주학을 접한 이들은 서양의 학문과 아울러 누구나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관에 몰입해 천주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801년 정조 임금이 붕어하고 나이 어린 임금 순조(純祖 제23대 1790-1800~1834)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은 영조 임금의 계비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는 천주교를 금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그동안 주문모 신부는 여러 신자들의 집을 오가면서 포교활동을 해왔으나, 더 이상 자신의 거처를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801년에 자수를 하면서 그가 만난 천주교 신자들의 명단을 관아에 제공한다. 이른바 신유사옥이다.

이로 인해 강이천은 제주도 귀양지에서 압송되어 오게 되고 며칠간의 재조사를 받는 도중에 옥사하며, 그의 동생 이문이 울산 탑골로 귀양 온다. 이 사건에 연류된 천주교인 중 김건순은 앞서 1797년 강이천이 혹세무민죄로 제주도로 귀양 간 사건에서 천주교인으로 분류되니 안동 김씨 문중으로부터 그릇된 부류들과 사귄다해 증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신유박해 때 강이천과 함께 처형된다. 당시 반체제단체에 안동 김씨가 연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씨 권력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정조 임금과 집권세력 안동 김씨 간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보게 된다.

이천의 할아버지 표암은 8세 때 숙종 임금의 국상에서 시를 짓는 등 특별한 재주를 보였으며, 어릴 때 예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강헌(1650-1733)을 따라 도화원에 들락거리면서 그림 그리기에 대한 동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금산 땅으로 귀양가고, 1728년 형 세윤(姜世胤, 1684-1741)이 영조 임금과 노론 세력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이인좌 난과 연관되어 유배를 가면서 가세가 몰락하자 처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한다.

표암은 처남 유경종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폭넓은 학식과 문인으로서 높은 안목을 키운다. 61세 늦은 나이에 영조 임금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병조참의·한성판윤 등을 거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손자들이 천주교도로서 연루되는 사건 발생 이전에 사망한다. 1822년이 되어 강이천의 가족이 복권되면서 동생 이문은 그가 귀양지에서 세운 탑골 교우촌을 떠나 고향 천안으로 되돌아갔다.

표암 강세황의 그림이 그의 손자 강이문의 귀양지인 울산에서 전시되고 있다. 표암의 그림에서 세월을 넘고 이념을 넘는 그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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