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나라 오키나와
친구의 나라 오키나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0.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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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沖繩)를 가려면 울산에서 인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로 바로 가거나 부산에서 배를 타고 큐슈(九州)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두 코스 다 특징이 있으나 편리성이라면 앞의 방법을 택한다고 친정이 오키나와인 친구가 일러 줬다.

오키나와는 14세기~15세기에 이룩한 류큐왕국(琉球王國)을 가리킨다. 류큐산잔(琉球三山)으로 알려진 츄우산(中山), 난잔(南山), 호쿠잔(北山) 3호족이 통일하여 이룬 독립된 왕국으로 동남아시아의 해상무역루트 중계자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일본 큐슈에서 타이완의 북단까지 이어진 난사이제도(南西諸島)에 속한 오키나와는 122만 여명의 인구와 55개의 섬으로 형성되었다. 14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에도 시대인 1872년 시마즈(島津) 가문이 지배하는 가고시마번(鹿兒島藩)에 복속되었고, 당시 류큐왕국이 츄우산 삿토(察度)왕 재임기인 1372년부터 실시해온 명(明)나라에 바친 조공 역시 금지 당했으며,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되면서 외교권과 사법권을 빼앗겼다.

일본은 1673년 하네지시오끼(羽地仕置)가 주장한 이른바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에 따른 동화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류큐의 고유 언어를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케 했으며 일본 본섬 사람들을 오키나와로 이주시킨다. 이 정책 역시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는 허무맹랑한 정책과 마찬가지로 왠지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꼼수라고 여겨진다.

일류동조론에 훨씬 앞서 통일류큐왕국의 제2쇼우씨(尙氏)왕조 제4대 쇼우세이왕(尙淸王 1497년~1555년) 재임 시기인 1529년에 세운 수례이노몬(守禮門)과 1644년의 수례이지몬(守禮之邦)은 ‘명나라에 예의 바른 나라’라는 뜻을 지녔다. 류큐는 1872년 시마즈 가문이 침공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중화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636년 당나라의 문헌 수서(隨書)에 기록되기를 류큐국은 ‘바다 섬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 남동부의 푸젠성(福建省)의 동쪽에 위치하며 물길로 5일이면 닿는다’고 기록했다. 류큐의 7세기는 패총시대에서 부족장 아지(按司)들의 지배 아래 영토확장을 위해 세력다툼을 하는 구스쿠(城)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아지로서 마을의 정치적인 지도자는 니츄(根人)라하며 토착 니츄와 외래인 니츄로 구분한다. 936년이 되면서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유민들 중에 류큐에 와서 외래인 니츄가 되었다는 설과 함께 1273년 고려왕실을 장악한 원나라에 대항한 삼별초가 폐망하자 난민이 되어 도착한 곳이 류큐지역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1273년 오키나와 본섬의 우라소에소도쿠(浦添城) 북쪽 요도래의 류큐궁궐 터에서 고려장인이 만든 기와조각이 그 증거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 1274년 10월, 원나라는 조공에 응하지 않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쓰시마를 시작으로 큐슈의 하카다(博多)를 차례차례 침략했다.

참고로 세계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공군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에 차출되어 오키나와로 출격한 한국인 탁경현(卓庚鉉) 전투조종사를 비롯해 그들의 청년들이 애국의 이름으로 죽음으로 내몬 가미카제특공대에서 ‘가미카제(神風)’란,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해풍(海風)에 의해 원나라가 실패함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은 해신(海神)이 그들을 도왔다는 의미로 해석한데서 나왔다고 전해온다.

아무튼 조공 문제의 핑계 뒤에는 삼별초를 끝까지 전멸시키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나하는 역사의 뒤안길을 되 짚어 보게 된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열도를 통일한 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첫 번째 야욕이 오키나와의 복속이었고, 다음으로 한반도 침공이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전쟁으로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계획을 알아챈 류큐 제7대 쇼네이(尙寧 재임 1589년~1621년)왕이 명나라에 그 사실을 전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 출병에 따른 손실을 오키나와에 떠넘겼다. 1871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정책 실시 이후 류큐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일본의 영토에 속하는 불운을 감당한다. 1894년 청ㆍ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안타깝게도 류큐 내의 독립 논쟁은 힘을 잃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7년에는 제주도 사람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표류하여 타이완국(臺灣國)과 마주하는 오키나와 최남단 야에야마(八重山)제도의 요나구니시마(與那國島)에서 구조되어 울산 염포항으로 귀환되었다고 기록했다.

한반도 임진전쟁으로 인해 몹쓸 어려움을 당한 오키나와가 올 여름 극심한 태풍으로 큰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친구의 친정집은 태풍이 비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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