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빈곤의 역사 씻는 현장 함께해 감개무량
민족 빈곤의 역사 씻는 현장 함께해 감개무량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08.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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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이병철 회장 등
부산 철도호텔서 비밀리 회동
울산 공업단지 입지 선정 구상
朴 대통령 최근접 거리서 모셔
고향 사람들 각종 민원 많아
한번은 이후락 비서실장 찾아
혜택 줄 수 있
▲ 울산토지조정위원회 브리핑 장면(1962. 12. 19).
▲ 손영길 前 박정희 대통령 수석 전속 부관
1961년 10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자신의 전속 부관인 손영길에게 갑작스럽게 부산 출장 준비를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특별한 용무를 밝히지 않은 채 출장 지시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특별한 사안이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산에 도착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해운대의 철도호텔에 짐을 풀었다. 2층짜리 단출한 호텔이었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호텔이었다.

도착 후 박정희 의장은 아무런 추가 지시를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손영길 부관을 다시 불렀다.

“내일 아침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중요한 보고를 받기로 되어 있으니 2층 회의실을 준비해. 내일 아침 이 회장이 대한조선공사 사장을 데리고 호텔로 올거야. 민간인은 그 두 사람만 참석시키고 일체 출입을 통제해야 하네. 우리 쪽에서도 건설부 장관과 경호실장, 그리고 자네만 참석해.”

이튿날 아침 이병철 회장이 호텔에 도착했다. 회의실에는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걸어두고 박임항 건설부 장관과 박종규 경호실장 등 네사람이 박 의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 의장이 자리에 앉자 이병철 회장은 준비해 온 차트를 펼쳤다. 그 차트에는 울산지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회장은 박 의장에게 차트를 펼쳐둔 채 보고를 시작했다.

“각하의 지시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중심이 될 공업단지 선정을 위해 석 달 동안 전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공업용수 확보, 기후, 항만 조건 등 제반 여건을 두루 갖춘 곳은 울산이 최고였습니다. 각하께서 구상하시는 공업단지 입지로는 울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이병철 회장의 보고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울산 지도를 펼쳐두고 공단이 들어설 자리, 물류 수송을 위한 기차역이 와야 할 자리, 심지어는 도로망 등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박정희 의장은 그 자리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좋소. 공업단지는 울산으로 결정하겠소. 이 회장은 그 공단에 비료공장을 지으시오. 농민이 잘 살아야 이 나라가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리고 손영길 부관을 불렀다.

“울산에 공업단지를 세운다는 사실은 일체 발설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의 보고를 들은 사람은 우리 측에서는 자네를 포함한 네 사람 뿐이다. 서울 올라가서 신속하게 최고회의의 의결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법적인 조치가 다 끝난 후에 발표할 수 있도록 하라.”

보고를 끝내고 희의실을 나오면서 이병철 회장이 손영길을 따로 불렀다.

“손 부관님의 고향이 울산 아니오? 그렇게 알고 있소만.”

“그렇습니다. 저의 고향이 울산입니다. 저의 고향에 공업단지가 들어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고향에 땅 좀 있소? 없으면 좀 사놓으시오. 부자가 될 테니.”

손영길의 머리에 고향의 산천이 주마등처럼 지나쳤다. 농업학교 건너편 허허로운 벌판이 스쳐갔고 이 회장이 구상하던 공단 주변의 방어진 항구나 장생포 일대의 그림 같은 풍경이 떠올랐다. 울산 공업센터가 지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켰던 손영길 부관은 바로 울산 학성동 출신의 손영길(80)장군이다. 정규 육군사관학교 1기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군으로 진급한 인물이다. 손 장군은 5·16 혁명 당시 대위로 박정희 의장의 전속 부관이었다.

“고향이 조국의 경제발전을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습니다. 이 회장이 브리핑 차트를 열어젖힐 때 울산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순간 놀랐지만 국가 최고 통수권자를 모시는 군인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회장이 땅을 사두라는 농담 어린 권유를 했지만 한 번도 그 욕심을 부려보지 못했습니다.”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때 박정희 의장을 수행해 행사장을 찾았다. 행사장에는 수천 명의 고향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의장의 목소리는 아직도 쌀쌀한 울산의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를 신공업도시로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번영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며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산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이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향사람들은 박정희 의장의 치사문 낭독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를 치고 환호 했다. 손 장군도 관중과 함께 벅차오르는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우리 민족의 빈곤의 역사를 씻는 중차대한 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 의장의 군사정권이 1963년 민정 이양할 때 박 의장 가까이 있었던 군인들이 대부분 퇴역을 하고 정치에 참여했지만 손영길 장군은 원대복귀를 자원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갔다. 원대복귀 후 전방을 떠돌았고 파월부대를 이끌고 전장을 누볐다.

1971년 수도경비사령관 참모장으로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근접 거리에 부임했다. 그러자 어떻게 알았는지 고향 사람들이 수시로 그를 찾아왔다. 대개 취직이나 공단 조성에 따른 각종 민원을 들고 와서 해결 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 모신 사람으로 그 정도의 힘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사람들의 민원을 한 번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충직하게 지키는 한 사람의 군인일 뿐이었다.

“한 번은 이후락 비서실장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고향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고향사람들 대신했습니다. 가령 각 기업에서 모집인원의 일정 비율을 울산사람들을 채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건의를 했습니다. 공단 조성을 위해 울산 사람들이 치른 희생도 있을 것이고 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 장군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울산공업지구 설정 선언문’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선언문은 1962년 2월 3일 자로 작성한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박정희’라는 명의로 된 이 선언문은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관련 산업을 건설하기 위해 울산공업지구를 설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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