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海石) 정해영 선생의 4가지 성취
해석(海石) 정해영 선생의 4가지 성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8.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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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출신 해석 정해영 선생은 첨단 산업을 일군 사업가, 민주화를 앞당긴 정치인, 신 명문가를 이룬 가장, 인도주의적 계몽가였다. 울산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해석 선생이 베풀었던 ‘동천학숙’을 거쳐간 후진들이 올 가을 선생을 오래 기릴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다. 동천학숙은 선생이 사비를 들여 1955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성북동에 마련한 기숙사다.

후진들은 선생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1950년대 어려운 시절 선생이 마련해준 기숙사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선생을 잊지 못한다. 25년간 그 학숙을 통해 배출된 인물들은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 등 현대사에 획을 그은 인물들이 많다.

해석 선생은 국리민복에 덕을 쌓을지 고민했지만, 자기사업의 성취에도 노력했다. 그 결과 19공탄이란 당시로서는 첨단 에너지를 개발했다. 나무를 베 땔감을 쓰거나 조개탄을 쓰던 시절 연탄에 19개의 구멍을 뚫어 질 좋은 연료를 개발했다. ‘대동연탄’이란 그의 상품은 전국 수요의 3분의1을 공급했다. 그 결과 부산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이 됐다. 그 사업은 지금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경남에너지’란 회사로 전수됐다.

그는 부의 축적에만 머물지 않았다. 암울한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1955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울산 을구에 출마, 당선되면서 야당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전두환 신 군부가 들어서기까지 7선의원으로 국회부의장까지 했다. 그의 정치사는 자유당 독재 타도, 군부통치 종식 등 민주화운동으로 점철됐다. 그런 과정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도 충실했다.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산업·의료·학계에 진출해 사회지도자로써 활동하도록 가르쳤다. 그의 가계를 훑어보면 ‘신 명문가’로서 손색없다.

필자가 해석 선생의 좀더 알게 된 것은 2008년 가을이었다. 북구 강동으로 넘어가는 꼬불꼬불한 무룡산 고갯길 중턱에 있는 묘역에서 해석 선생의 묘비 제막식이 있었다. 2005년 91세로 타계한지 3년만이었다. 이 고갯길을 넘나들며 잘 단장된 묘역이 어느 집안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그날 이 묘역의 주인공들을 알게 됐다. 중구 진장동 들판을 배경으로 300석 지기를 하던 영일 정씨 집안 묘역이었다. 5대에 걸친 묘가 이곳에 있었다. 해석 선생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곳에서 4km 떨어진 곳이다. 이 선산은 200여년전 정씨 집안을 드나든 한 승려가 선택해 준 곳으로 한 일가에서 모두 14대에 걸쳐 국회의원을 배출한 명당이란 소문도 나 있었다.

14대란 해석 선생이 국회의원 7차례, 아우 정일영 전 의원이 2차례, 해석 선생의 아들 정재문 의원이 5차례 역임한 것을 뜻한다.

제막식에는 정일영, 정재문 전 의원이 참석했다. 또 동천학숙을 거친 안우만 전 법무장관, 심완구 전 울산시장, 최병국 전 의원, 태영그룹 정우모 부회장 등의 모습이 보였다.

행사는 차분하고 엄숙했다. 정재문 전 의원은 해석 선생의 일대기를 묻는 필자에게 의자를 권하며 정중히 설명해줬다. 정 전 의원의 부인은 손님에게 국밥을 손수 나르며 다과를 권했다. 부인은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딸이라고 했다.

선생은 사회를 보듬는 도량이 큰 계몽가였다. 사재를 털어 운영한 동천학숙이 그것이다. 이 학숙에는 울산에서 서울로 유학한 학생 500여명이 거쳐갔다. 경남 합천 출신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장관도 이곳을 거쳤다. 주로 울산 출신 유학생이 머물렀지만 강 장관처럼 예외적으로 혜택을 보기도 했다.

선생이 사람을 안는 품이 넓었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기피인물이었던 소설 ‘남부군’의 저자인 고 이우태씨를 지원하기도 했다. 선생은 정치활동 내내 야권에 머물렀지만 선생의 학숙을 거친 사람들은 여야로 나뉘었다. 최형우, 심완구 전 의원은 정통 야당이었고 김태호, 차수명, 차화준, 최병국 전 의원 등은 여당이었다. 선생의 학숙을 거친 인물들이 시대의 변전에 따라 각각 한 몫을 한 것이다. 선생의 아들 정재문 전 의원 역시 김영삼 정권때 여권의 국회 외교통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선생의 호 해석(海石)은 ‘파도가 그치지 않는 바다에 있으나 요동하지 않는 바위와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선생은 일제압박, 한국동란, 자유당 독재, 군부통치 등 격랑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신과 제가를 넘어 치국 평천하를 위해 독보적인 길을 걸어간 인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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