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영 선생 송덕비 추진
정해영 선생 송덕비 추진
  • 정선희 기자
  • 승인 2012.08.1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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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야당사 거목이자 울산 동량배출 산파
7주기 맞춰 동천학사 출신 50여명 기념식
▲ 1986년 3월 23일 아들 정재문 의원의 부산진지구당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부산시지부 결성대회에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고문과 함께 한 정해영 선생(오른쪽). 이날 개헌집회에는 10만 이상 부산시민이 참석해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루는 기폭제가 됐다.

 

울산 출신으로 정·재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해석(海石) 정해영(鄭海永 1915~2005)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16일 선생이 서울에 세운 기숙사 ‘동천학사’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고 정해영 선생의 7주기에 맞춰 오는 10월쯤 울산에 송덕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추진위는 심완구 전 울산시장을 비롯해 안우만 전 법무부장관, 최형우 전 내무장관, 오세민 전 조폐공사 사장, 차화준, 최병국 전 국회의원 등 동천학사 출신 50~ 60명이 주축이다.

심완구 전 시장에 따르면 지난 2월말 기념비 건립 의견이 모아져 공동추진위원장에 안우만 전 장관, 정우모 태영그룹 부회장, 심완구 전 시장 등이 결정됐고, 지금까지 3천여만원의 사업비가 모아졌다. 우선 재경 향우회를 중심으로 추진위를 구성했고 울산시와 울산지역 유지들도 이 사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오는 25일에는 심 전 시장을 비롯해 정해영 선생 장남 정재문 전 의원, 정동락 전 한수원사장 등이 울산에서 송덕비에 쓰일 석재를 고를 계획이다. 건립될 장소는 해석의 고향인 중구 남외동 정재마을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심 전 시장은 최적한 비를 세우기 위해 최근 울산에 있는 충숙공·최현배·박상진·김홍조 등의 비를 모두 둘러봤다고 밝혔다.

심 전 시장은 “지금처럼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1950년대에 후학을 위해 동천학사와 같은 장학사업을 편 해석선생의 업적은 미래의 귀감이므로 추념사업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 해석 정해영 선생은

정미소 기반으로 19공탄 첫 제조

7선의원 정통야당으로 민주화 앞장

해석 정해영 선생(사진)은 1915년 울산 중구 진장동에서 300석 지기로 미곡상을 하던 집에서 태어나 병영초등과 외솔 최현배 선생 사랑방을 드나들며 학습했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부산 범일동에서 태공정미소를 경영하며 기초를 닦은 뒤 당시로는 첨단산업인 연탄공장을 창업해 19공탄을 처음 개발·시판해 전국 연탄 공급의 3분의1을 차지했다. 그로인해 산림황폐화를 억제하는데 기여했고 32세에 ‘석탄왕’ 칭호를 얻었다.

39세 때인 1954년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 출마해 3대 민의원에 당선된 뒤 7선을 했으며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된 제8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선생의 정계활동은 모두 야당생활이었다. 고향후배인 이후락 중정부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야권에 머물렀고 오히려 군정종식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선생이 후배들을 위해 1955년 서울 성북동에 설립해 1980년까지 운영한 ‘동천학사’는 울산 출신 서울 유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사회 각계 500여명의 주요 인사들을 배출했다. 동천은 선생이 유년의 꿈을 피운 울산 동천강에서 따왔다.

출신인사들은 고 김태호 내무장관, 최형우 전 내무장관, 안우만 전 법무장관, 심완구 전 울산시장, 박진구·이규정·차수명·차화준·최병국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박맹우 울산시장도 동천학사 마지막 기수로 분류되고 있다.

선생의 동생 정일영씨는 2선의원을 지냈고 아들 정재문씨는 3선 의원을 역임했다. 특히 재문씨는 김영삼 정권 때 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했고, 지난 2003년 부산에 ‘해석 정해영 선생 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선생은 2005년 가을 향년 91세로 영면했다. 묘소는 북구 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선산에 있다. 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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