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화해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2.08.1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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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1918~1975)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최근 묘소 이장 과정에서 선생의 유골을 검시한 결과 두개골이 함몰된 흔적이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선생의 장남, 호권(63)씨는 이를 근거로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선생의 사망 당시 당국은 사인을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발표를 곧이듣지 않았다. 진상규명운동도 수차례 진행됐다. 정확한 사인을 규명해 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의문사’라고만 불러왔다.

선생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반복했다. 이 기록은 선생이 박 정권의 얼마나 큰 걸림돌이었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선생의 의문사는 유신반대투쟁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불렀다. 선생의 생전, 성경번역에 몰두하는 신학자에 머물렀던 늦봄 문익환 목사도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 목사는 선생과 숭실중학교, 일본신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테타는 이성계의 역성창업과 곧잘 비견된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근간으로 한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조선왕조 500년간 성리학 이외의 이념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배척했다.

그런데 정작 이성계는 성리학의 절대 가치인 불사이군(不事二君) 원칙을 위반했다. 조선조에 발생했던 두 차례의 반정에서도 반정세력이 직접 집권하지는 못했다. 왕손 가운데 새 임금을 찾아 옹립하는데 그쳤다. 그만큼 유교사회에서 불사이군의 가치는 큰 것이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의 최고 책무가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헌법은 신임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하게 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통치 기간에 준법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입법도 직접 했다. 국회의원 3분의1을 임명한 데다 수시로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주도해 일으킨 5·16 쿠데타는 헌법을 유린한 것이라는 비판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다만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상황론적 변명이 고작이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부친의 창업에 걸림돌이었던 포은 정몽주를 철퇴를 날려 격살(擊殺)했다.

장준하 선생의 유골에서 발견된 두개골 함몰 흔적이 기관원의 타격에 의한 것이라면 선생도 격살된 것이다. 질기고도 모진 역사적 악연이다.

그런데 포은은 사후 9년 만에 정적이었던 이방원에 의해 복권됐다. 훗날 태종으로 불리게 된 방원이 왕위에 오르던 해에 포은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뿐만 아니라 포은의 신주는 중종조에 문묘에 배향됐다. 조선조에서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선비로서 최고의 영예다. 성인의 반열로 예우한다는 의미이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과거사 반성에 따른 사면 복권이 이뤄진 셈이다.

포은과 함께 조선왕조 창업을 반대했던 야은 길재는 고려의 국운이 저물 때 낙향했다. 태종은 그런 야은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야은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고사했다. 태종은 그런 야은도 후대했다.

야은이 후손들의 출사를 허용한 것은 세종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이 개국한지 30년이나 지난 뒤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통을 이은 사림(士林)의 김종직, 김굉필, 김일손 등이 출사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조정은 점차 사림에서 점유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세력과 반대 세력의 후예들은 화해했다. 사림의 후예들은 이성계의 후손인 조선의 왕들에게 충성을 다했다.

반면, 5·16, 유신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 간의 화해는 아직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권력을 쥐었던 세력에 의한 과거사 반성도 없었다. 사법살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민청학련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죄와 보상도 최근에야 이뤄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화해는 가해자 측의 사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아직 부족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과는 피해자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적당한 말 몇 마디로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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