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센터 직접 입안·건설 한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역사
공업센터 직접 입안·건설 한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역사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08.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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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 지난 2월 3일 열린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 유공자 수상식에 참여한 오원철 전 수석(맨왼쪽). 오 전 수석은 이날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오원철(84)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울산공업센터를 직접 입안하고 건설을 주도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상공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오 전 수석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정책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5월부터 였다. 당시 국산자동차회사의 공장장이었던 그에게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출두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최고회의에 출두하자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단의 조사과장이라는 직책이 부여됐다. 그리고 기획위가 5개월만에 해산되고 나서는 상공부의 공업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확정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울산을 특정공업센터로 지정했다. 기후나 용지, 항만, 수송 등 여러 가지 여건이 가장 뛰어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태화강이 있어 기본적인 공업용수를 충당하고 거기서 부족하면 낙동강에서 물을 끌을 수 있는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공장을 세울 넓은 땅이 있었고 항만이 발달됐으며 철도만 연결해 주면 물류수송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건회의 일행은 1월초 연휴를 이용해 울산을 방문했다. 말하자면 입지시찰이었던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상공부 공업국 화학과장이었고 오 전 수석을 비롯한 상공부 직원들도 동행했다.

일행은 현장을 시찰하고 나서 당장 조사단을 구성하고 공업센터 기공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시찰을 위해 울산을 방문했던 오 전 수석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은 울산에 주저앉았다. 울산초등학교 교실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울산군청 앞 여인숙에 숙소를 정했다. 1월초의 엄동설한이 몰려와 당시 사무실이나 숙소에서 겪었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생이 막심했지만 울산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이 내려와 공업센터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환영하면서 베푼 인정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당시 울산은 시골 소도시에 불과해 정유공장의 기름 탱크가 설 자리인 바닷가로 가는 길은 소달구지만 다니는 길이어서 지프차가 겨우 다녔습니다. 길목에서 부녀자들이 길로 나와 ‘서울에서 온 손님들이 울산에 공장을 지어준다’며 환호했습니다. 종이로 만든 고깔모자를 쓰고 박수치고, 만세삼창을 하는 걸 보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사단이 현지에 머물면서 만든 자료를 통해 종합 회의를 열었다. 그 때 안경모 조사단장이 회의를 주재했는데 공단의 대지와 분야별 배치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종합 회의 때 오 전 수석에게 먼저 의견을 내놓으라고 했다. 오 전 수석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한 백만 평 필요합니다. 좁게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유공장에는 꼭 배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항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울산시를 울산만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로 갈라야 합니다. 그래서 서쪽은 화학계통에서 다 쓰고, 동쪽은 중공업계통에서 썼으면 좋겠습니다.”

오 전 수석의 의견은 이견없이 받아들여졌다. 동쪽에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가 들어서고 서쪽에는 정유공장, 석유화학, 비료공장이 들어섰다. 당시의 구상이 지금의 공단 배치로 이어졌다. 조사단의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송요찬 내각수반이 울산을 방문했다. 송요찬은 조사단 모두에게 격려의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업발전, 경제발전 시발점이 되니까 열심히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덩치가 큰 송요찬 내각수반의 손은 엄청나게 크고 완력이 대단했다. 모두들 야구 글러브와 악수를 하는 것 같았다고 농담을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작성한 조사단의 보고서를 받고 재건회의는 2월 3일을 기공식 날짜로 못박았다. 보고를 마친지 불과 보름 후로 결정된 것이다.

“기공식 당시의 울산은 도시 전체가 잔치분위기였습니다. ‘정부가 울산을 잘 살게 해 준다’면서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인 우리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기공식날에는 군중이 몰리는 바람에 지프차가 길을 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시내 곳곳에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농악패가 흥을 돋웠고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오 전 수석은 자신의 손에 의해 입안된 공업센터 기공식이 있던 날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그 날의 열기가 그립다고 술회했다.

본격적으로 울산공단의 조성이 들어갔다. 기업인들이 와서 울산공단의 현지를 답사했다. 오 전 수석은 기업인들을 안내해서 계획된 공단 부지를 소개했다. 기업인들은 부지 가격에 민감했다. 그런데 당시 땅값은 평당 5원 정도를 달라고 했다. 기업인들은 도대체 이렇게 싼 데도 있느냐고 반가워했다.

울산 공단에 가장 중요한 공장이 정유공장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공을 들여왔던 사업이었다. 정유공장을 지으려면 큰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을 끼고 있어야 했다. 10만t, 20만t이 넘는 유조선을 댈 부두가 없는 울산은 고민 끝에 바다 위에 커다란 부이를 띄우기로 했다. 부이와 정유공장의 저장 탱크까지 파이프로 연결해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 방법은 현재까지 항만 접안시설이 부족한 울산의 정유공장들이 활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오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했다.

“5·16에 대한 평가는 생각에 따라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울산은 엄청난 혜택을 누렸습니다. 당시 오지였고 시골어촌에 불과했던 울산을 박 대통령이 공업특구로 지정해 경제재건의 진원지로 삼았습니다. 혁명정부가 내세운 5대 핵심과제 중 3대과제가 경제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 울산은 그 출발지였고 목적지였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 전 수석은 울산의 발전상에 대해 남들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고 있다. 산파의 기쁨이 그런 것이다.

“울산은 지금 세계 최고의 산업도시입니다. 울산에 있는 정유공장 능력과 석유화학 산업, 글로벌 경쟁력 5위의 자동차 회사, 세계 1위의 조선소 등.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큰 대기업들이 밀집한 산업도시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부에서도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울산시민들의 열의가 모아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외국 사람들을 많나면 울산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합니다. 그것을 들을 때 마다 그 때 공업센터 입안을 했던 사람으로 울산시민께 감사를 올리며 또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울산의 산업발전은 물론 국가 경제발전을 이끈 주역인 오 전 수석은 이미 여든을 넘겼다. 살아있는 역사인 셈이다.

오원철 전 수석은 1928년 황해도 풍천에서 태어나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당시 공군소위로 임관해 1956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전역후 한국 최초의 자동차회사인 시발자동차 공장장과 국산자동차 공장장을 역임했다.

5·16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발탁돼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화학공업분야 계획을 입안하고 울산공업단지에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설립 등 관련사업을 추진했다.

상공부 제1공업국장이던 1965년 석유화학공업 육성계획을 직접 입안했으며 광공업 차관보로 승진한 후에도 석유화학공업 육성 책임을 맡아 1972년 울산석유화학단지를 완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정리= 이상문 기자·사진= 울산제일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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