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있기 없기?!
매뉴얼 있기 없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7.2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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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작업실까지는 도보로 20분거리입니다. 한적한 아파트 사이 도로를 지나 조금만 가면 번화가가 나옵니다. 평소 자주 가는 카페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합니다. 알바생에 따라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 알바생일수록 맛의 간극은 큽니다. 그 간극에 따라 내 표정의 간극도 커집니다.

영화 ‘이보다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은 로맨스 소설 작가입니다. 그는 자신과의 수많은 매뉴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집을 나설 때도 현관문은 잘 잠겼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길을 걸을 때도 보도 블록의 선은 밟지 않으며 식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위치 같은 자리에만 앉아야 하고 자신이 준비해온 나이프와 포크로만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의 매뉴얼은 강박과 같지만 그것을 지킬 때에만 마음의 평온을 찾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정해진 매뉴얼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작업실에 도착해서는 나만의 매뉴얼이 있습니다. 우선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작은 화분들이 밤새 잘 있었는지 살펴본 후 베란다로 옮겨 물을 줍니다. 그런 다음 지난번에 하던 작업 상황을 파악하고 작업실의 정리정돈 상태를 점검합니다. 판화작업에 있어서 청소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거나 기자재가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을 때 작업진행에 방해가 됨은 물론, 안전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어 정리정돈은 필수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정해진 매뉴얼대로 각자의 분야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돌아갑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건사고 대부분이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회사에서, 병원에서, 학교나 건설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업무에 있어서의 매뉴얼은 만드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업무를 담당자가 조직 내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 방법으로 하게해 실수를 예방하고, 특정인이 아닌 누가 그 일을 하더라도 똑같이 업무를 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드러날 경우, 보다 나은 매뉴얼로 발전시켜 나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전국을 대혼란에 빠뜨린 정전사태는 매뉴얼을 무시한 한국전력 거래소의 단전조치가 원인이었습니다. 이에 박충화 대전대 소방방재학교 교수는 “현재 한국의 재난 대응 매뉴얼은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며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훈련을 안 하니 이번 정전 사고처럼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 허둥지둥 대다 피해를 더 키우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일에 있어서 매뉴얼은 필수입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의 매뉴얼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스무 살에 대학을 가야하고 졸업 후에는 취직을 해야 하며 그 후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그러고 나서는 아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물어보거나 확인합니다. 대학도 ‘어느 대학’이 중요하고 회사도 ‘어떤 회사’가 중요합니다.

그림에는 매뉴얼이 없습니다. 음악에도 매뉴얼이 없습니다. 마음, 감정에도 매뉴얼은 없습니다.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감정 앞에는 어떤 매뉴얼도 무용지물입니다. 이상형을 아무리 결정지어놓고 철저히 계획을 세우더라도 결국 만나는 사람은 전혀 계획하지 못한, 단지 ‘끌리는 사람’입니다. ‘내 나이가 얼만데’, ‘내 처지에’, ‘내 외모에’, 라는 기존에 있는 매뉴얼도 사랑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사이도 매뉴얼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너무 당연한 매뉴얼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다가가 이렇게 한번 물어 보세요.

매뉴얼, 있기?! 없기?!

다음번에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맛의 간극이 늘 일정한 카페 사장님의 커피를 기대합니다.

<이하나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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