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트위스트
상하이 트위스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7.1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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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의 위력은 생각보다 컸다. 일행들이 상하이를 방문하면서 떠올린 게 뜬끔없이 설운도의 노래 ‘상하이 트위스트’였으니. 정작 상하이는 트위스트 춤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에겐 오히려 슬픈 역사를 안겨준 도시였다.

중국과 얽히고설킨 역사적 인과관계가 아니더라도 높은 습도와 삼십도가 훨씬 넘는 기온 때문에 상하이는 여름철 관광코스로는 꽤나 불편한 도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부신 고층 건물 숲 사이사이로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상하이는 습기가 많아 장롱 속의 옷을 햇볕에 건조시켜서 입어야 외출이 가능한 도시라고 했다. 눅눅한 빨래처럼 더위를 머금은 상하이의 습도는 삼박사일 동안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붙었다. 그 끈끈한 습기와 함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까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나라와 가깝고 싼 경비 맛에 많이 찾는다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맞닥뜨린 것은 오랜만에 뒤적거리는 역사교과서처럼 낯설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상하이를 처음 밟는 사람이라면 으레 관광코스에 끼이기 마련인 상해 임시정부는 스쳐지나가기에 딱 좋은 장소에 있었다. 상하이 신천지는 이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곳이 많았다. 한 쪽은 유럽의 어느 도시들처럼 세련된 면모를 자랑했으나, 임시정부 청사가 자리 잡은 곳은 흘러간 영화 속 세트의 한 장면으로 다가왔다. 청사 주변의 허름한 골목길엔 오래된 민가들과 남루한 빨래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아마 그 시절, 이 골목엔 빨래들이 지금처럼 빨랫줄에 간당간당 걸렸을 것이다. 마치 나라의 앞날처럼 위태롭게. 골목을 돌아드니 자그만 현판 몇 개가 그나마 이곳이 임시정부 청사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개인으로 방문하면 임시정부의 활동 영사기도 틀어주지 않는다고 연변 출신 가이드가 자랑처럼 떠들어댔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임시정부 청사를 중국의 한족들이 관리를 하고, 조선족 출신의 안내원이 무표정하게 우리말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내 나라 역사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영혼의 울림도 없었다.

그러니 내 두 눈으로 꼼꼼히 볼 수밖에. 삼 층까지 이어진 좁은 계단을 통해서 들어선 방들은 하나같이 작고 초라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방 하나가 원룸보다 작았다. 김구 선생의 애틋한 가족 사랑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고, 독립운동 당시 긴급한 연락을 취했을 낡은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말이 좋아 임시정부이지, 사방이 민가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비밀스런 독립운동을 한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이 녹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짠했다.

구십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 한국 돈의 인기는 달러와 맞먹었다. 굳이 위안이나 달러로 바꾸지 않아도 중국에선 원화의 가치를 높이 샀다. 팁을 줄 때나 물건을 살 때도 위안보다 한국 돈을 더 선호했다. 호텔 룸서비스도 한국 돈으로 하라는 가이드의 말이 새삼 실감났다.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가 부럽지 않았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동방명주 탑도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어둠이 깔리면 갖가지 보석으로 탈바꿈하는 상하이의 야경과 닮은 꼴 하나없이 하늘과 경쟁하는 상하이의 고층 건물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쪽방 같은 임시정부청사에서 삼십년 간 나라를 위해서 싸운 선조들의 든든한 빽이 있어 괜스레 어깨가 으쓱거렸으니. 내 땅에선 느끼지 못했던 얼치기 애국심은 이런 순간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현충일이 있고 육이오가 있던 달.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신 내 아버지도 육이오 참전용사였으니. 그나마 유월 마지막 주에 상하이를 다녀와서 호국보훈의 달이 무색하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애국심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들은 구닥다리 어르신들이나 쓰는 말이라 생각했고 진보를 외쳐야 시대에 발맞추는 민주시민으로 여겼다. 상하이에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뼛속 깊은 곳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아있을 줄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노래가 이유 없이 히트하지는 않을 듯. 상하이와 트위스트는 묘하게 어울렸다. 다음에 상하이를 다시 들른다면 임시청부 청사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신나는 트위스트 춤을 추고 싶다. 님들 덕분에 이만큼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었다고.

<박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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