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년 내려온 고래고기 맛 무의식에 녹아든 울산의 특질
7천년 내려온 고래고기 맛 무의식에 녹아든 울산의 특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6.1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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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먹었던 고래고기 맛의 기억

외할머니기가 입에 넣어준 한 조각의 비계를 빨아먹으며, 양고기의 참 맛을 익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몽골의 갓난아이처럼, 지나간 시절의 토박이 울산 어린이들은 오베기를 먹으면서 고래고기의 맛을 익혔던 것이다.

몽골의 갓난아이는 비계가 많은 산양이 ‘쿠르듀크’인지 따위는 몰라도, 잘 익은 비계는 어떤 맛인지를 성장하면서 익히고, 또 그것을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 갓난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그의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그의 손자나 손녀에게 비계를 먹여줄 것이다.

중년이 된 토박이 울산사람들도 어린 시절에 먹었던 오베기가 고래꼬리를 소금에 절여서 만든 것인지 따위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베기는 그의 미감 속에 잊을 수 없는 고래고기 요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고, 더욱이 고래고기가 귀한 지금은 특별한 날만이라도 한번쯤은 그 맛을 보고자 하는 음식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음식을 통해서도 특정 지역민 및 가계의 전통이 후속 세대에게로 전해지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음식은 만드는 이의 솜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그 지역의 특산물과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원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그와 같은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양이 많은 몽골에서는 양고기가 주식이며, 아무르 강 등 연어가 많이 회유하는 지역에서는 그것을 훈제하여 먹는 것처럼, 울산의 바닷가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고래 고기를 주요 음식 중의 하나로 요리하여 먹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고래의 부위 중의 하나인 꼬리를 소금에 절여 사시사철 즐겨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업포경이 금지된 이후, 사람들은 이제 그 맛을 회상하면서 특별한 날에는 꼭 한 번 정도 먹어보고자 하는 음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포경기념일’이 4월 16일이라고 한다. 4월 16일이 ‘포경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1946년 바로 그 4월 16일에 한국인이 해방 후 처음으로 장생포에서 출항하여 솔피(범고래)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포경업 다시 일으킨 故김옥창 옹

해방이 되고, 일본의 포경회사에서 근무하였던 포경선 승선 선원들 가운데 김옥창(金玉昌)을 비롯한 일부 뜻 있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장생포의 고래잡이들은 길고도 긴 동면 속에서 빠져 나와 새롭게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옥창을 중심으로 한 포경업 종사자들이 포경선을 구입하고, 또 ‘조선포경주식회사’를 설립한 것도 그 해 가을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8년에는 자체 기술로 포경선과 포경포를 만들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하여 포경업은 일취월장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포경주식회사가 포획한 고래의 수는 1946년에는 참고래 66두, 1947년에는 참고래 48두와 기타 1두, 1948년에는 참고래 67두, 귀신고래 6두, 돌고래 1두, 범고래 1두 등이었다고 한다.

선원들 중에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포경선원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시력이 좋기로 유명하여 고래의 출현을 관찰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나중에는 군함에 승선하여 적선을 관찰하는 역할까지 하였다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해방 후에 장생포에서 다시 포경업에 종사하였다.

포수 가운데는 김세곤, 박선이, 서용이, 김해진, 이만출 등의 제씨가 있었으며, 이들 중의 대부분은 장생포에서 태어나서 마지막 상업 포경이 이루어지던 시기까지 활동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김세곤은 울산이 기억하는 마지막 명포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양원호표 대포’도 이제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울산 사람들은 포경선을 구입한 후, 만족할 만한 포경 실적을 올리게 되었지만, 보다 정확한 성능의 포경포를 갖고자 하였으며, 이에 포경포 제작의 적임자로 쇠 다루기 유경험자 양원호를 지목하여 그것의 제작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두 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된 그의 포는 1961년에 ‘삼영호’라고 하는 포경선에 장착되어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그의 포는 국·내외의 포경업계에 ‘양원호표’ 대포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양원호표 대포’ 완성후 사업 활성화

포경선과 명포수 그리고 ‘양원호표’ 대포가 결합되면서,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고기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에 덩달아 고래고기를 삶는 집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김윤태(金倫泰)의 집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김윤태와 아들 김용준 부자는 세를 받으며 고래 고기를 삶아 주었는데, 그들이 남긴 이윤 가운데는 고래고기를 삶아주는 세와 함께 솥에 남은 고래 기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곱 개의 솥에서 고래를 삶았는데, 각 솥에서 수합한 기름이 반 드럼 가량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석유가 귀한 시절이었고, 그러므로 고래 기름은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식용유, 등유 등은 물론이고 과수원 살충제 배합제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삶은 고래고기는 사방팔방으로 팔려나갔는데, 어촌은 물론이고 산촌으로 고래 고기를 머리에 이고 팔았던 행상인도 이 시절에 등장한 새로운 직업인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가장 싼 것이 고래 고기였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즐겨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속에 닿아있는 어제와 오늘

이 모든 일들은 불과 한 세대 전에 벌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있다. 사라져 없어진 것 가운데도 더러는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들도 있고, 기억을 더듬어서야 새삼스럽게 상기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울산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주목해 보면, 어제와 닿아 있지 않은 오늘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 날 세계 최고이자 최첨단의 공업 도시가 된 울산, 그것의 어제는 포경선을 구입한 김옥창이나 두려움 없이 고래와 맞섰던 김세옹 등의 명포수, 작살포를 만든 양원호, 고래 고기를 삶으며 기름을 분류하였던 김윤태 부자 그리고 심지어는 고래 고기를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행상을 하였던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팔고 다녔던 고기 중의 하나가 ‘오베기’였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의 어제는 과연 어디에 잇닿아 있는 것일까?

할머니가 입에 넣어 식힌 다음, 손자의 입에 떠 먹여준 된장국이나 청국장에 대해 그것이 위생적으로 불결함을 토로하는 젊은 엄마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유전 인자는 그런 방법으로도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엄마가 소금에 절여둔 오베기를 씹으면서 짭조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맛보았던 어린이들은 커서도 고래 고기의 맛을 기억한다. 몽골의 갓난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양고기의 비계를 즐겨 먹는 것처럼. 울산 사람들의 DNA는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제의 조상들로부터 오늘에 이어졌으며, 그것은 우리들의 세대를 거쳐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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