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의 미학
줄서기의 미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5.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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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인 5일 오전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미국 플로리다(Florida)를 찾아갔다. 연중 온화한 햇살이 가득하고 ‘꽃이 피는 곳’이란 뜻을 지닌 세계적 휴양지다. 부연하자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플로리다 중부의 올랜도(Orlando) 근처에 있는 어린이들의 테마파크 ‘디즈니 월드(Disney World)’에 앵글을 들이댔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프로그램은 덤으로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플로리다 동쪽의 오락관광지 ‘데이토나 비치(Daytona Beach)’, 그리고 ‘은퇴 어르신들(55세 이상)의 천국’이라는 ‘더 빌리지스(The Villages)’도 같이 소개했다. 특히 ‘The Villages’ 편에서는 “미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줄서기’ 장면을 화면에 올렸다.

바닷가 레스토랑의 줄서기는 그야말로 장사진(長蛇陣)을 이루었고, 대기시간 10∼20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참을성 있게 줄을 서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앞바다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새우의 요리였다.

미식가(美食家) 대열에 끼어든 그들은 너나없이 ‘느림의 미학’ 체험에 동참하고 있었다. 구이와 튀김, 이 두 가지의 독특한 새우 맛을 고루 즐기기 위해서였다. 외지에서 큰 맘 먹고 찾아왔다는 한 30대 미국 여성은 “생전에 꼭 한 번 맛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방문의 동기라고 말했다.

‘줄서기’라면 단연 이웃 섬나라 사람, 일본인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새치기가 판을 치던 시절, 우리네의 무질서를 걱정하던 뜻 있는 인사들은 곧잘 이런 얘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쪽바리(일본인)들이 아무리 밉더라도 그들한테서 배울 건 배우자”고.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인의 양면성에 대해 쓴 책의 이름은 ‘국화와 칼’이었다. 이 양자 가운데 특히 칼은 ‘사무라이(武士)의 나라’ 일본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의 주특기 ‘줄서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있다. 다시 말해 ‘칼’은 일본인들에게 은연중 면종복배(面從腹背)의 근성을 몸에 배게 만들었고, 이 근성이 바로 줄서기의 모양새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줄서기란 ‘권력에 대한 맹목적 순종’ 의사의 표출일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줄서기라면, ‘정파주의’ 혹은 ‘계파정치’ ‘계보정치’가 만연해 있는 우리나라 정치계의 공천 권력자에 대한 그것을 빼놓을 수 없다. 여당인 새누리당이든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이든 대부분의 정당들은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른바 ‘경기동부연합’ 계열로 더 잘 알려진 통합진보당 ‘당권파’ 인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를 같은 맥락에서 줄서기의 좋은 본보기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다.

울산의 경우, 제18대 국회 이전까지만 해도 줄서기를 유난히 즐기는 정치지도자가 이따금 있었다. 귀향을 위해 울산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그분들은 하늘같이 높은 ‘귀하신 몸’이었다. 그분들을 영접하는 주체는 당원협의회의 ‘배지 없는’ 당직자들이 아니었다. 시의원, 구의원 배지를 단 지방의원들이 더 열성적으로 그 일에 앞장서곤 했다.

수직적 조직문화에 길들여진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언행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차기 불공천’이란 ‘조직의 쓴 맛’을 감내할 수밖에 없기에 그랬다는 게 정설이었다. 이에 대한 온정주의 역시 우리 정치계 저변의 한 문화요소로 자리 잡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당협위원장(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에게 공천권한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도 비등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가 앞으로는 기우에 그칠지 모른다. 우리네 정치판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바람은 제19대 국회의원을 뽑는 4·11 총선이 일으켰다. 낙선자, 당선자를 가리지 않고 예외 없이 높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더 낮은 자세’였다. 어느 당선자는 ‘국민의 머슴’이 되겠노라 골백번 다짐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변화는 충분히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계제는 아니라는 의구심이 여전히 살아있다. “줄서기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고 단언한 어느 국회의원 당선자의 단호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하게 긍정하지 않는 지방의원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탓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처럼, 부정적 정치문화의 한 단면은 그것을 있게 만든 당사자가 과감히 도려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스스로 내켜서 하는’ 줄서기가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만 진정한 ‘줄서기의 미학’도 화사하게 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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