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형 변호사와 공격형 변호사의 성격을 이야기삼아보자. 수비형 변호사는 성격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문제 삼는 사안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방어를 할 뿐이다. 문제는 공격형 변호사에 있다. 이들은 우선 경쟁에 민감하고 항상 경쟁에 이기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때로는 잘 못을 저질렀어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을 도우는 정서가 없다. 11월,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컬어 성격 장애자에 가깝다. 성격장애자는 남을 괴롭혀도 자신은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양심이라는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 한편 수비형 변호사는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여 모든 잘못이 자기한테 있는 것으로 여겨 신경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남을 괴롭히지 못한다.
대학의 교수 중에도 학생들에게 수비형 교수가 있고, 공격형 교수가 있다. 수비형 교수는 자기들만 옳다고 공격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세월아 가라 나는 월급만 타고 너희들과 부딪치지 않겠다고 속으로 되뇌며 지낸다. 이런 학생들 뒤에는 대개 성격장애자 비슷한 공격형 교수가 있어서 공격하는 방법과 방향을 넌지시 학생들에게 가르쳐준다.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 기초 질서가 무너지는 데에는 소비형 교수가 신경증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자신만을 탓하고 괴로워하며 보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공격형 교수로 다가가 기본을 가르쳤어야 했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풍토가 학문하는 기본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는 기본을 중히 여기는 풍토로 바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는 약 15년 전, 신입사원을 향해, 회사가 여러 분의 적성에 맞는 일을 맡기기 전에 여러 분의 적성을 회사의 기대에 맞추어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 했다(‘신화는 없다’ 에서). 올바른 공격형 교수의 기질에 맞는 말이다. 다만 공격형 변호사가 되어 쫓기는 개를 물어 정신과 신세를 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