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유감
어린이날 유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5.01 2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에서 있었던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을 접하면서 소학(小學)에 나오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되새기게 된다. 이유는 올해의 어린이날이 축하 받는 날이 아니라 유감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진부한 이야기로 일제 강점기에 방정환 선생님이 ‘이’라는 존칭어를 어린애한테 붙여 나라의 미래를 맡길 ‘어린이’라고 새로 이름을 지어, 젊은이, 늙은이, 멋쟁이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물론 말괄량이도 ‘이’가 들어가지만 높여주는 뜻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남녀유별은 더 높은 수준에서의 논의이니까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일곱 살을 먹으면 같이 앉혀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어린이를 ‘성인축소형’으로 보았던 발달심리학적 관점이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유럽의 아동관은 어른의 모든 행동이 축소되어 작은 체격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즉, 일곱 살만 먹으면 어른처럼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성(異性)으로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따로 떼어 놓아야 ‘거시기’를 저지르지 못하게 예방한다는 뜻이다.

물론 현재는 발달심리학의 발전탓에 ‘어린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세계가 탐색 중에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스위스 발생학적 인식론의 세계적 학자 피아제의 보존개념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요즈음 소송이 되어 있는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의 ‘아름다운 집’ ‘멋있는 집’의 이야기이다. 어른한테 아름다운 집은 어떤 집일까 물어보면, 대개가 비싼 집을 떠올리고, 어린이한테 물어보면, ‘꽃이 만발하고 토끼와 새들이 놀고 있는 집’을 머릿속으로 그린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린이의 눈높이가 이상하게 되어 옛날식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신약 성서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 어린이의 말을 하고 /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가 나온다. 그래서 오늘 어른들은 무지개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마당의 개미를 데리고(?) 하루 종일 놀 수도 있다.

어른들은 거짓말로 자기의 눈을 가린다. 어른들은 자기가 믿는다는 신까지도 속인다.

대구의 성폭행을 당한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먼 산의 남의 일로만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울산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너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야 간단하다. 가정에서 철저하게 여러 가지를 참아내는 ‘참을성 기르기’ 훈련을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담임선생님이 어린 학생들 말만을 잘 못 믿고 단순 폭행자 학부모를 면담하려고 했다가 오해 받은 학부모로부터 교내가 떠들썩하도록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자기 반 아이들까지 보는 데서 당한 일이다. 어른부터 감정(화, 성적 충동, 재물 탐욕, 권력 욕심)을 조절하지 않고 그대로 폭발시키니까 아이들도 TV에서 본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남녀칠세부동석을 부활 시켜서 본능까지도 억제하는 참을성 훈련을 시켜야 한다.

어린이날을 맞이하며, 시(詩)제목 ‘동화(童話)’를 소개한다.

옛날 날마다 / 내일은 오늘과 다르길 / 바라며 살아가는 /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장영희 역; 축복. 비채)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 되기를 바라는 어린이 마음을 그린, 희망을 노래한 시로 어린이날의 유감을 달래려고 한다.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