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정어리·고래잡이를 축제로 이어와
유럽은 정어리·고래잡이를 축제로 이어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2.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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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9세기 바스크族 포경을 원조라 여겨
고야가 그린 사육제 과정은 세계적 명작
선사 반구대 고래형상 알려지면 역사 수정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그림 가운데 <정어리 축제> 또는 <정어리 매장(埋葬 The burial of the sardine)>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을 아래위로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위는 나무와 하늘이 차지하고 있고, 아래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군중들이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세 사람 뒤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이 거대한 깃발을 들고 있는데, 그 깃발은 검정색 바탕에 신상(神像)으로 여겨지는 커다란 얼굴이 그려져 있다.

‘정어리 축제’ 또는 ‘정어리 매장’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그림의 어디에도 정어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고야는 왜 이 그림의 제목에 굳이 ‘정어리(sardine)’라는 말을 써 넣었을까? 흔히 이 그림은 사순절 이전에 벌이는 사육제(carnival)의 한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서 부활절에 이르기까지의 금욕 주간 이전에 벌이는 축제이며, 이 축제에서 사람들은 정어리 장식품을 마드리드 인근의 만사나레 강둑에 매장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제기되었다. 정어리 축제라고 한다면, 신상으로서의 정어리가 등장하여야 하는데, 화면 중간의 깃발에 그려진 거대한 얼굴이 정어리 신상을 형상화한 것인가? 도대체 이 축제의 주인공들은 왜 정어리를 위한 의례를 거행하여야 했는가? 왜 하필이면 정어리일까? 축제의 신상으로 밀을 비롯한 곡물신이나 알타미라 동굴 속에 그려진 들소 같은 동물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라 정어리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등등이 그것이다.

고래를 잡았던 민족과 그 포경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반드시 프랑코·칸타브리아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바스크 족과 만나게 된다. 바스크 족은 바로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제작한 집단들의 후예로 지목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포경업에서는 빼고자 해도 뺄 수 없는 유명한 고래잡이들이다. 포경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연구의 첫머리에 바스크족을 언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바스크 족의 일부는 현재 프랑스의 브르타뉴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에 둘러싸인 비스케 항 주변에 살고 있다.

바스크인들은 이미 9세기경부터 매년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비스케 항으로 회유해 오는 북방긴수염고래를 잡았는데, 이것이 포경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바스크인들은 고래를 잡는데 노력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비스케 항을 중심으로 한 연안에 어망을 설치해 두면, 북방긴수염고래들이 그곳으로 회유하여 들어와서 그것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득불 고래들이 어망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쫓아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포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바스크족이 잡고자 하였던 생선은 정어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정어리 떼들이 비스케 항으로 몰려들었다. 그런 까닭에 일찍부터 바스크족을 비롯한 어부들은 그물을 설치하여 정어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어리가 나타날 무렵이면 북방긴수염고래도 이 항으로 회유하여 왔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한 때, 고래들이 정어리 떼를 따라서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이해하였던 적도 있었지만, 정어리나 고래가 모두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번식하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찾아 왔던 셈이다.

이렇듯, 바스크 족은 자신들의 생활 터전으로 몰려들어오는 정어리와 더불어 고래를 잡았으며, 그로부터 고래잡이 집단으로 포경사의 첫머리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잡은 고래에서 기름과 수염을 귀중히 여겼으며, 또 고래의 혀를 특별히 맛있는 부분으로 인식하였던 듯하다. 물론 기름은 등화용으로 활용하였고 고래수염은 각종 공업용 원자재로 이용하였다. 고래 혀는 소금을 쳐 저장하였으며, 피레네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고야가 그린 <정어리 축제>는 바로 이른 예로부터 비스케 항으로 회유하여 오던 정어리를 잡으며 살았던 바스크 족이 벌인 축제의 잔흔(殘痕)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 속의 깃발에 그려진 얼굴은 정어리의 의인화된 형상이었으며, 만사나레 강둑에 묻었던 정어리의 모형은 처음에는 정어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바스크 족이 잡았던 고래잡이의 원형을 더듬어 들어가다가 고야의 그림 <정어리 축제>를 떠올렸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스크족은 정어리보다도 고래잡이에 더 명성을 날렸다. 비스케 항으로 회유하여 오던 고래는 남획 등으로 인하여 마릿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고래들도 학습효과에 따라 점차 그 항을 멀리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들이 대담히 먼 바다로 나갔으며, 이후 북빙양의 고래기지 개척에 맞춰 또 다시 바스크족의 이름을 휘날리게 되었다. 16세기 중엽부터는 바스크 족의 역할을 영국과 네덜란드의 고래잡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596년에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하고, 그곳에 서식하는 고래들을 본격적으로 포획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국은 1604년에 포경회사 ‘무스코비’를 설립하고 북빙양에서의 포경을 개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등도 매년 여름 스피츠베르겐 섬에 모여서 고래잡이를 하였다고 한다. 물론 스피츠베르겐에는 다국적 국제도시가 매년 여름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는 그들의 포경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그 이름을 ‘스미렌부르크’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경유 정제 공장과 저장 탱크, 포경 자재와 식량 운반용 시설, 호텔 그리고 항구 등이 들어섰다. 북극의 섬 가운데는 암스테르담과 같은 거대한 도시가 세워진 셈이었다. 그런데 그 섬 가운데 세워진 마을 이름 ‘스미렌부르크’는 ‘기름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암각화 등 선사 및 고대 미술 속에 남겨진 고래잡이의 그림들을 아직 주목하지 못했던 초기의 고래잡이 연구에서는 포경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전 세계에는 바스크 족의 비스케 항과 같이 계절에 맞춰 고래들이 정기적으로 회유하여 오는 만과 항구들이 산재하여 있고, 그곳에는 그 시원을 알기 어려운 이른 예로부터 고래들이 포획되었다. 그 가운데 몇몇을 열거하면, 노르웨이 북부 지역의 ‘로이드’, 베링해협의 ‘페그트이멜’ 그리고 카렐리야 지역의 ‘벨로에 모레’ 등이다. 또한 한반도의 ‘장생포’나 일본의 ‘타이지’ 등도 그의 좋은 예들이다. 물론 그 밖에도 다른 예들이 많이 있다.

이들 지역에 살았던 선사 및 고대의 고래잡이들은 그들의 진솔한 삶은 바위표면에 적나라하게 새겨 놓았는데, 그 속에서 이미 수천 년 전에 당당히 고래와 맞서 고래를 잡았던 포수들을 만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림 속 포수들의 모습과 함께 불분명하고 어렴풋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구전들 속에서 포수들의 무용담과 그들의 애환 등을 하나씩 더듬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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