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의 神 헤르메스
전달의 神 헤르메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2.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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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라 했나요. 그리스 신 헤르메스는 나그네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는 벼락을 무기로 하여 천둥·번개·비·바람을 장악한 하늘의 신인 제우스의 아들 중 한 명이며 신의 심부름을 맡아서 전달하는 전령신(傳令神)이다. 날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 날아다니면서 빠른 속도를 내어 천상에 있는 제우스와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신 하데스를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으며, 여행자를 보호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어찌하여 전지전능하다는 신들도 텔레파시로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 전달자를 두고 연락을 했으니 참 재밌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암송으로 타인에게 전달하려면 전달자도 그 내용을 알기에 어떠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타인에게 누설하거나 내용을 다르게 전달할 수도 있지만 기록에 의한 전언이라면 그 기록이 타인의 손에 들어가도 그 내용을 해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언(傳言)의 비밀을 보호하는 방법의 문제도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1993년 1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의 저명한 우표수집가 오토 호르눙그(Otto Hornung)가 쓴 우표수집 그림백과사전(Illustrated Encyclopedia of Stamp collecting)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용한 문서 전달방법이 나오는데 흥미롭다. 문서 전달을 위해 적절한 노예를 선발해서 삭발한 머리에 전달할 내용을 쓴 다음 한참 지나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쓴 글을 숨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출발시킨다. 긴 여행기간에 머리는 점차 더 길고 머리숱이 많아지게 될 즈음이면 전달자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다시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전언을 해독한다. 이럴 경우 전달자가 배신을 하지 않는다면 머리에 쓰여진 그 내용은 타인이 전혀 알 수 없으며 또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이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에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암송으로 전달해주는 마나스치가 있어 전통 구전문학인 ‘마나스’를 서사시(敍事詩)의 형식으로 전해 준다. 마치 한국의 무가(巫歌)처럼 노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1500~1200년경부터 유행했다는 인도의 성스러운 찬가(讚歌)인 ‘베다(Veda)’도 그렇고 일본의 역사서도 암송을 통해 구전되어 내려온 것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자가 사용되기 전의 지구촌 모든 민족이 이와 유사한 형식을 빌려 그들 조상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었다고 믿어도 틀림없다. 고대사회에서 문자를 쓰는 것은 선택된 얼마 안되는 사람들만의 알려진 방법이었다.

이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인 8,000여 년전에 울산의 태화강을 따라 살았던 반구대 사람들은 그들만의 문자를 새기면서 결속을 다졌으니 거룩함이 엿보기기도 하다.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46-861~ 875)때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왕이 되고 난 뒤 귀가 당나귀 귀 만큼이나 길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의 갓(冠)을 만드는 복두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 도림사(道林寺)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고 토했다. 그 뒤 바람이 불어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면 그런 소리가 계속되니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게 했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의 귀는 길어요”라는 소리가 났단다. 비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애쓴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하면, 경문왕이 즉위한 시절은 앞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846)를 828년 청해진(지금의 전남 완도) 대사로 임명했던 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6)이 붕어하고 불과 25년 사이에 왕이 6번이나 교체되었던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런 신라의 하대(下代)였다. 대개 ‘귓구멍이 크면 남의 말을 잘 듣는다’하여 어리석다는 의미를 감춘 하얀 거짓말이 있으나, 당나귀 귀를 간직한 경문왕은 재위 기간에 3차례의 모반이 일어났음에도 불교세력을 통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아쉽게도 30세에 붕어 하니 그의 아들 정(晸)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울산의 개운포에서 동해용과 외교전을 펼친 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이다.

온 세상을 손바닥 위에서 실시간 까뒤집듯 하는 작금의 세상에서,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을 쥐가 듣는다는 잠언(箴言)을 스스로 얼마 전에 비로소 깨달았으니 참으로 둔하기도 하다.

전옥련

울산문화관광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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