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50년, 영광의 그늘
울산 50년, 영광의 그늘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2.02.02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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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강기영(67)씨는 일요일임에도 일터로 나갔다. 울주군 온산읍에 있는 폐기물중간처리업체의 파쇄기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용접공인 강씨는 일거리가 있을 때만 출근하는 일용직이었다. 고령이기 때문에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요일이지만 불러 주는 것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일터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그날 퇴근하지 못했다. 작업 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망원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파쇄기 수리 작업 중에 작업반장이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강씨는 순식간에 작동되는 파쇄기에 압착됐다. 이 파쇄기는 폐합성수지, 폐전선 등을 재활용하기 위해 잘게 써는 기계이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훼손됐다.

작업반장은 같은 판넬에 있던 다른 기계의 작동 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그만 그 파쇄기의 작동 버튼을 눌러 버린 것이다. 이를 방지할 그 어떤 장치도 없었다. 최소한 그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지키고 서 있었던 사람도 없었다.

강씨는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왔다. 울산공업센터 건설이 시작됐던 1962년의 일이다. 타고난 성실성이 유일한 밑천이었던 그는 건설현장을 전전하면서 용접일을 배웠다.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안정된 직장을 얻지는 못했다. 평생을 일용직 근로자로 지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중동 건설붐이 일었을 때는 그도 수차례 해외 건설현장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녀교육비를 가계 지출의 최우선 순위로 잡았다. 자녀들은 대학 공부를 마치고 자기 일을 찾아 나섰지만 그는 12평짜리 주공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울산공업센터 50년의 눈부신 성과와 그의 삶은 비례하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금강휴게소 건너편에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영령 77위를 모신 곳이다. 1970년 7월 7일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고속도로 준공식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먼저 이 위령탑을 찾아 참배했다. 개통테이프도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구간에서 끊었다.

조국근대화의 진군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냉혹하고도 비정했던 철권의 통치자도 국토의 대동맥을 건설하며 제대로 보상도 못해준 산업전사들의 영령 앞에서는 예를 갖췄다. 한국도로공사는 지금도 매년 7월 7일에 이곳에서 합동위령제를 주관해 지내고 있다. 위령제에는 순직자 유족도 참가한다.

공업센터 50년 동안 울산의 비약적인 발전성과 뒤에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희생이 따랐다. 거대한 원유탱크를 건설하면서 높이 50m에서 추락해 숨지거나 중상을 입은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면서 철판에 깔리거나 바다로 추락해 숨진 근로자도 숱하다.

기회의 땅 울산에 청운의 꿈을 품고 왔다가 비명에 간 근로자의 가족들은 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돌아보는 기념행사를 보며 남다른 슬픔에 젖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전시설이 제대로 갖춰 지지 않은 작업 현장에서 무방비로 땀을 흘렸던 근로자들과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희생자들이 영광의 그늘에 묻혀 있다.

아직도 안전시설이 미흡한 작업장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땀흘리는 근로자들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축제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 기념행사에 산업재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상징물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갖지만 위령탑 건립 소식은 없다. 산업재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킬 위령탑을 산업수도, 울산 어딘가에는 건립할 필요가 있다.

< 강귀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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