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 신화’는 계속 돼야한다
‘포니 신화’는 계속 돼야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2.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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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주요 상징물을 찾는다면, 현대자동차가 자체적으로 모델을 개발하여 생산한 ‘포니(Pony)’가 그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포니는 1975년 12월 첫 생산이 시작돼 1976년부터 출고됐다. 출고가격은 227만원 정도 였으며, 첫해 1만726대의 판매실적을 올려 단숨에 국내 승용차 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했다. 성능도 좋아 최고시속이 155km/h 이었으며, 시가지 주행연비도 14km/ℓ 정도 나왔다고 한다. 당시로는 우수한 성능을 갖춘 자동차였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포니’ 덕택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고유모델을 갖는 국가가 됐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국산 승용차로는 최초로 해외(남미 에콰도르) 수출됐는데, 이것은 우리도 자동차를 수출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포니는 1990년 포니Ⅱ가 단종 될 때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로 군림했으며, 한국 산업발전의 ‘국민적 상징물’로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스런 포니도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70년대 들어와서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합작회사를 설립키로 하고, 3년간의 긴 협상을 벌였으나, 1973년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강인한 의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자동차 생산을 결정하고, 우리의 고유 모델 개발을 추진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이너 조지아가 디자인하고, 80마력을 낼 수 있는 배기량 1,238cc급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탑재하여 1974년 6월 마침내 모델을 완성했다.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이룬 것이라 그런지 새로운 자동차 탄생을 기다리는 국민적 관심도 대단했다. 이러한 국민적 관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현대자동차에서는 자동차 이름을 전국적으로 공모했다. 1974년 7월 18~ 8월 25일(39일간) 사이 공모를 실시한 결과 전국에서 5만8천여 통의 응모엽서가 접수됐는데,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나온 것이 ‘아리랑’이었고, 그 다음은 유신, 무궁화, 새마을 등의 순위였다. 그런 심사를 거쳐서 현대적 감각을 살린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로 최종 결정했다.

현재 울산박물관에는 포니 2대가 전시되어 있다. 한대는 1979년 내수용으로 생산된 것으로 3도어, 자동변속 기어장치를 갖춘 것으로 박물관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국내에서 운행됐다.

소장자는 포니를 매일 닦고 광내는 등 귀한 자식처럼 돌보았다고 한다. 또 다른 한대는 1981년 수출용으로 생산된 것으로 네덜란드에서 역수입했으며 30여년간 세계를 누비다가 이제 고향 울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대의 전시된 포니를 바라보면서 울산 더 나아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신화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유럽의 근대식 산업발전은 200여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도 혁명이란 단어를 붙여 ‘산업혁명’이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한 이래 50년도 지나지 않아 여러 산업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했다. 196 0년대부터 이룩한 우리나라 산업발달을 어떤 말을 사용해서 표현하면 적당할까? 적당한 표현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필자가 이름 붙이자면 도저히 믿기지 못할 정도로 발달했다는 의미에서 산업혁명을 넘어 ‘산업신화’라고 명명하고 싶다. 1인당 국민소득이 1961년 82달러에서 2011년 2만3천달러(추정치)로 280배 증가했다. 세계사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다. 이것이 신화 그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1953년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 들어와서 “이 나라가 전쟁 전상태로 재건되는데 최소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후 한국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희망이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한국은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하게 서게 됐고, 맥아더 장군이 살아있다면 자기말을 부끄러워했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했다.

남의 나라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위치로 세계의 중심국으로 발전했다. 이런 발전의 중심에 바로 울산이 있었다. 또한 산업발전의 상징물로 ‘포니 신화’가 그 중심에 당당히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포니 신화’는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고, 포니신화와 더불어 울산은 찬연한 빛을 발하는 도시로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규성 울산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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