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새 아침
망향의 새 아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1.2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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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명절 설이 지났다. 설은 새해의 첫 시작이다.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 출발을 하는 첫날이다.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는데 일 년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설에는 ‘삼가다, 사린다, 조심하다, 설다, 선다’라는 뜻으로,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예부터, 일 년 내내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신중히 첫발을 내딛는 매우 뜻 깊은 명절로 여겨져 왔다.

이번 설에도 수많은 귀성객들이 각자 자신의 고향을 찾아 가족, 친지들과 뜨거운 혈육의 정을 나누고, 죽마고우와의 끈끈한 우정을 새삼 확인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물질문명에 젖어 갈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현대생활에서 그나마 일 년에 두 차례라도 큰 명절이 있어 그리웠던 사람과 만나 돈독한 정을 나눌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80년대 초에 고향 울산을 떠났다. 20대의 파릇파릇하던 시절, 서울 모 잡지사 기자시험에 합격, 타향에 발을 딛고 산 지 30년이란 세월이 지나 어느덧 지천명을 훌쩍 넘기고 말았으니 세월의 빠름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외로운 객지 생활이었으나 그래도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명절 때마다 필자도 귀성객의 대열에 합류하는 행복감을 누릴 수 있었다.

도로와 교통수단이 미비했던 그 무렵, 비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교통정체에 시달리기는 했어도 고향으로 향하는 그 설렘과 기쁨은 인생의 어떤 즐거움에 견줄 수 없는 뜨거운 희열 그 자체였다. 그러나 14년 전 선친이 돌아가시고 장손인 필자가 제사를 서울로 모셔 오면서부터 ‘귀성의 희열’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으니 객지에서의 외로움은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만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망향의 쓸쓸함을 그나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설 연휴 기간의 고궁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명절 때마다 서울 시민들을 위해 전통민속놀이 한마당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명절에도 필자는 차례를 지내고 처가 어른께 인사를 다녀 온 뒤 모처럼 가족들과 무료관람의 혜택이 주어지는 고궁나들이에 나섰다. 첫 목적지인 시내 중심가 덕수궁을 찾았더니 평택농악, 남사당놀이가 신명나게 펼쳐졌고, 발길을 돌려 창경궁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는 통명전(通明殿) 전각을 열어 어른 공경문화 확산을 위해 한복을 차려입고 부모님께 세배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우리가 웃어른께 세배나 절을 올리지만, 올바른 예절법에 어긋날 때가 많은데, 세배법도 배우면서 궁궐 안에서 부모님께 세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여서인지 선착순 200명이 순식간에 차 버리는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특히 경복궁에서는 고종황제의 집무공간이었던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에서 세배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종로 3가로 발길을 옮겨 종묘에 닿으니 향대청(香大廳)에서는 종묘제례기능보유자로 인간문화재인 이기전(李基田) 선생이 신년 덕담을 써서 나눠주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웅장함과 엄숙함이 깃든 종묘에서 신년 덕담을 받아든 시민들은 이미 새해 소망이 술술 풀리기 시작이라도 한 듯 행복한 미소 짓기에 바빴다. 특히 각 고궁에서 나누어 주는 세화(歲畵)에 시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세화란 임금이 설날에 신하의 무병장수를 위해 하사하던 그림을 말하는데 요즘으로 치자면 새해 덕담이 담긴 연하장이라고 볼 수 있다. 경복궁에서는 국왕이 친히 세화를 나누어 주는 풍습을 재현, 시민들이 명절에 대해 느끼는 감회를 더욱 새롭게 했다.

시간이 빠듯해 일일이 다 둘러 볼 수는 없었으나 궁궐과 왕릉을 비롯한 유적기관 곳곳에서는 팽이치기,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등 전통민속놀이가 펼쳐져 아이들과 함께 추억을 담아갈 수 공간이 마련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설 명절을 맞아 비록 고향을 찾지는 못하지만 문화재청이 해마다 기획하는 다채로운 전통문화 행사는, 서울 시민과 실향민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과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세시풍속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대사회에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인 궁궐과 왕릉에서, 설 명절의 의미와 가족애를 되새길 수 있는 행사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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