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천사
얼굴없는 천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1.1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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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변에 사회봉사 활동을 유난히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인 그는 생업에 신경 쓰기도 바쁜 와중에 귀한 시간을 쪼개어 각종 사회봉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양로원이나 지체장애자 보호시설, 치매 요양원 등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이다. 늘 그의 활동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대가 없는 일에 저렇게 적극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필자는 종종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는 매번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면 현장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봉사후기와 함께 자신의 블로그에 사진을 꼬박꼬박 올린다.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곤 했다. 봉사자들의 정성으로 이발과 목욕을 마친 말쑥한 차림의 장애인이나 어르신네들이 봉사자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찍은 단체사진을 보노라면, 이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사진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흐뭇함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을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필자는 어떤 진부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판에 박힌 듯한, 또는 어떤 이벤트의 성격이 짙게 배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오로지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는 그 참뜻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때마다 인증샷(?)을 인터넷 상에 올리고 수시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꼭 필요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 것이다.

어차피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조용한 봉사’가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도 결코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기 때문에, 봉사자들은 참된 봉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항상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기도 했다.

필자가 이러한 생각에 젖어 들 무렵인 지난해 12월, 전북 전주시 노송동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났다는 뉴스가 사회면 머리기사에 올랐다. 누군가가 벌써 12년째,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와, 성금 상자가 있는 장소를 알려 준 뒤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써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자신의 모습은 일체 드러내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놓고 간 상자에는 동전에서부터 1천원 권, 5만원 권 등 다양한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정체를 늘 궁금해 하던 동네 주민들은 그가 약국이나 철물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라거나 또는 기업체 사장, 아니면 무속인일 거라는 갖가지 추측을 내놓았지만 이 ‘얼굴 없는 천사’는 늘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만 돈을 놓고 가고, 전화도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걸어왔으므로 주민센터는 오래전에 수소문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얼굴을 찾게 되면 천사가 아니다’며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송동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 정착지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고 생활환경도 열악한 곳이라는데, 얼굴 없는 천사가 2000년부터 올해까지 12년째 유독 이곳에만 2억 5000여만 원을 기부하고 있어 이곳이 그의 고향이 아닌가 추정되어 왔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토해양부와 전주시는 140억 원을 들여 기부자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살기 좋은 동네’로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먼저 노송동에 지상 3층 규모의 건물과 공원을 만들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는데, 건물의 한 층은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천사테마관’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그 ‘얼굴 없는 천사’가 오랜 세월 동안 베푼 따뜻한 온정이 드디어 큰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위에는 외롭고 아프고 가난한 이웃이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사정을 외면한 채 아직도 나누기 보다는 모으기에 급급하며 나와 내 가족만이 잘살면 된다는 생각에 매여 사는지도 모른다.

사회 지도층이나 많이 가진 자들도 자신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서 차츰 멀어져 가고 있지나 않은지 자주 되돌아 볼 일이다. 모쪼록 ‘얼굴 없는 천사’들이 더욱 넘쳐나 불우한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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