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랜 고래도감이자 뛰어난 박물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고래도감이자 뛰어난 박물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2.0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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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곳에 고래만 67마리 새긴 곳 유례없어
경험하지 않으면 그릴수 없는 온갖 형상
종의 분류·놀이와 생활·포획법 등 망라
고래산업 통해 막강 선사문화 축적 예시
이미지(象)를 떠올리고 또 그리거나 만든다는 것은 그것의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과 또 그것에 관하여 듣지 못한 것을 떠 올릴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보고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의 생김새와 크기, 색깔, 냄새 그리고 유·무익함의 정도 등을 살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그린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스토리 속에 다양한 모습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각각의 제재 또는 주인공과 그 협역들에 대한 변별과 분류 등이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분하였고, 그로써 각 제재가 갖고 있는 고유성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동일한 종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제작 집단이 그것들에 대하여 매우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 속에 그려진 고래가 그렇다. 이 암각화 속에는 모두 270여점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서 고래는 59점이며, 미완성된 것 8점까지 보탠다면 모두 67점에 이른다. 그 다음으로 사슴이 41마리가 그려져 있고, 멧돼지가 21마리, 호랑이가 20마리 등의 순서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암각화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재는 고래이다. 고래는 전체 형상의 약 25%에 이르는 수치이다. 이는 그려진 형상 네 개 중의 하나가 고래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점으로써 고래가 이 암각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270개의 형상 중 4분의 1이 고래라고 한다면, 암면의 중요한 부분이 고래로 뒤덮여 있을 정도로 이 형상들이 압도적인 공간 점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제작 집단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제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암각화 제작 집단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 사항이 바로 고래였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생활이 영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없지만, 고래의 기원과 그것과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 그리고 타부 등 온갖 관념과 제도 그 밖의 불문율 등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고래가 지니고 있는 효용성에 대해서 제작 집단은 똑똑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서 그것의 생김새, 종과 종 사이의 차이 그리고 각각의 특성 등을 매우 세세하게 구분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고 또 언제 가장 많이 나타나며, 얼마만큼의 기간 동안 머물다가 떠나가는 지 매우 정확히 관찰하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것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먹으며, 얼마만큼 크는 지 등도 훤하게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 유용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지의 방법도 알고 있었고, 보다 쉬운 방법을 찾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잡으려면 바다로 나가야 함도 알았으며, 마침내 배를 만들고 또 작살도 만들었던 것이다. 고래의 어디를 공격하면, 가장 쉽고 또 빠르게 잡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즉 길고 지루한 학습 기간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과정은 결코 단시간에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되었을 것이며, 대다수의 구성원들의 삶에서 그것을 알고 또 잡으며 가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암각화 속의 고래 형상은, 삶의 현장에서 매일매일 목격한 고래잡이 어부들의 고래에 관한 비망록이었으며, 또 그것을 추적하였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리얼한 생명 예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힘들었겠지만 대곡리 선사시대 사람들은 중단하지 않았으며, 그 일상들이 조형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고래 하나하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이 암각화 속에 그려진 고래 형상들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정도로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언제나 살필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인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이 어떤 순간 또는 상황 속에 있는 모습인지 알 수 있다.

대곡리 암각화 속의 고래 형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것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순간의 모습들 때문에 새삼 놀라게 된다. 왼쪽 위의 암면에서부터 살피면, 우선 부리가 뾰족한 돌고래가 보인다. 몸통에 기생 물고기가 덧그려진 고래나 작살이 그려진 고래도 있다. 무리를 이루며 공기방울을 내뿜고 또 자맥질하려는 고래도 있고, 가슴지느러미가 커다란 고래나 배에 줄무늬가 잔뜩 나 있는 고래, 배가 하얀 고래도 보인다. 머리 부분이 뭉뚝하게 생긴 고래도 있고 또 꼬리지느러미가 비대칭적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고래는 몸통을 선으로 구분한 것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림 속에는 그물과 함께 그려진 고래, 배에 이끌려 가는 고래, 작살자비의 표적이 된 고래, 고래잡이배와 함께 크게 요동치는 고래도 보인다. 그것들은 얼핏 보아도 고래잡이 어부들과 관련된 일상임을 알 수 있다. 어부와 고래가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른 선사시대 울산만 사람들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암각화 속의 고래들은 마치 눈앞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는 고래 떼의 대 이동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암각화 속의 고래 형상 하나하나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살필 수 없는 고래에 관한 수많은 장면들이 조형 예술의 형식으로 번역된 것이다. 바로 울산 대곡리 선사시대 사람들의 고래학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암각화 유적지에서 이와 같은 고래 그림을 살필 수 없다. 그러므로 대곡리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 도감이자 박물지인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고래와 더불어 희로애락 하였던 사람들의 삶이 형상 하나하나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장에서는 아직까지 미스터리에 싸여있는 선사 시대 대곡리 사람들의 고래학을 대곡리 암각화 속의 고래형상들을 통하여 엿보고자 한다. 그들이 조형 언어로 기록한 고래들의 모습을 통하여 시간들이 단절시킨 옛 울산 대곡리 사람들의 고래와 얽히고설킨 이야기, 즉 그들의 고래에 관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되짚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고래학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얼마만큼 윤택하게 하여주었는지도 되짚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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