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순수비의 출발, 천전리각석
진흥왕순수비의 출발, 천전리각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1.0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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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의 아래에 해당되는 부분에 신라 시대의 글로서 명문이라 지적하는 내용 중 539년에 새긴 추명(追銘)에 심맥부지(深麥夫知)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가 바로 7살에 왕위에 오른 신라 제24대 진흥왕(534년 법흥왕 21년~576년 진흥왕 37년/재위 540~576년)이다. 그의 어릴 때 또 다른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이다. 외할아버지가 불법을 흥하게 한 임금인 법흥왕(法興王)이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여 년 뒤 어머니의 섭정에 벗어난 뒤로는 연호를 건원(建元)에서 개국(開國)이라 고쳤다. 이때부터 왕은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정복사업을 통해 확장된 강역인 북한산(北漢山)·창녕(昌寧)·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등지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한편 심맥부지의 아버지 입종의 형님이 법흥왕이니 법흥왕은 큰아버지이면서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왕위를 자기네끼리 독차지하려다보니 족보상으로 지금과는 다른 혼란스러운 관계가 성립됨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런 시기였었다. 권력이 뭐 길래.

551년 진흥왕은 재위 12년에 이르러 정권을 자기 스스로 운영할 즈음에 군사력 또한 강성하여, 백제의 영토인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고 고구려 땅인 함주(咸州)·이원(利原) 근방까지 정복하여 신라 최대의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순시(巡視)한 곳마다 기념비를 세웠다.

진흥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천전리각석이 있는 서석곡의 글쓴바위에서 14년 전에 이곳에 온 아버지의 흔적을 확인했고, 539년 어머니와 함께 왔을 당시에도 이곳에 온 내용을 바위에 새겨둠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520년 외할아버지인 법흥왕은 심복인 이차돈을 재물로 바쳐 불교를 앞세워 정권을 차지하게 되고 신라의 원 토착세력을 누르게 되면서 마침내 율령을 반포하고 권력을 평정했다. 그런데 친자로서 아들을 두지 못한채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심맥부지의 아버지인 동생 입종은 537년경에 이미 죽었으니, 한 명의 남동생, 그리고 왕의 둘째부인 옥진궁주에게서 낳은 아들과 외손자간의 권력 다툼을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훗날, 조선시대 어린 조카 임금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삼촌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는 그 과정의 왕위 쟁탈전은 한 예에 불과하지 않을까? 권력은 부모형제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들 하니.

법흥왕 친 딸의 자식인 심맥부지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치열한 물밑작업이 진행됐음을 자료에서 살펴 당시 정황을 유추해 보게 된다. 해서 심맥부지 가족이 천전리 서석골에 온 것은 예사롭지 않다. 화랑세기에 이르기를, 1세 풍월주 위화랑편에 ‘법흥대왕은 왕비인 보도부인을 비구니가 되게 하여 그의 딸 지소태후(지수시혜비)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하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는 위기에 빠졌다. 공(1세 풍월주 위화랑)이 이에 대의로써 옥진을 깨닫게 하여, (진흥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지소태후는 아들 심맥부지가 왕위를 승계 받음이 확증된 상황이기에 돌아가신 남편에게 이러한 내용을 고하고, 그들간의 결속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서석골을 찾았을 것으로 여겨본다.

어린 진흥왕이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굳이 글을 새길 도구를 준비해 와서 천전리 서석곡의 글쓴 바위에 그들이 왔다간 이야기를 인증샷으로 남겨두는 모습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차지한 강역에다 순수비(巡狩碑)를 세운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한편 천전리각석에서 궁금한 점이 또 있다. 추명 밑에 새겨 둔 남자의 아랫도리는 누구를 가리킬까?

525년과 539년에 왔던 아혜모호부인은 그 사람을 알고 있을 터인데 그 역시 말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화랑세기에서, 2세 풍월주 미진부공편에 보면,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의 지아비(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원화(源花)를 물러나도록 하였다고 했다.’ 혹여 영실공일까? 해서 539년 이곳에 온 모즉지태왕(법흥왕)의 비(보도부인)가 그 초상을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이 온 내용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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