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때문에 절집 태운 속사정
빈대 때문에 절집 태운 속사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0.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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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웅촌면 검단리 정족산 반계마을에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운흥사 절터가 있는데 종이를 제작했다는 절집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종이 제작 부역 때문에 절집이 불태워 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이 매우 역설적이다.

가까운 양산의 통도사 역시 종이 제작 부역으로 폐사될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당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1783∼1859) 대감에게 탄원하여 종이 제작 부역을 탕감 받아 폐사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이웃하는 양산 신흥사도 종이 부역에 시달려 닥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스님들이 절집을 떠났다고 전해온다. 대개 빈대 때문에 절집을 불태웠다는 말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종이 제작 부역을 견디다 못해 스님들이 떠나면서 폐사 되었다고 짐작되기도 한다.

얼마나 미련한가, ‘가벼운 중 떠나면 그뿐’인걸 어렵게 지은 절집을 굳이 왜 불질렀을까? 아무리 들어도 수긍할 수 없었으나 폐사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가지산을 넘어가면 청도다. 청도향교 명륜당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나타나는 대성전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청도향교의 건물배치를 보면 제사기능을 담당하는 대성전과 강학기능을 담당한 명륜당, 두 건물을 좌우로 배치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사찰 자리에 서원 또는 향교의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그 증거 중 하나를 청도향교의 대성전 지붕 기와의 수막새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범어(梵語)인 ‘옴’자가 대성전 수막새에 박혀있는 것이다. 이 ‘옴’자 수막새의 사정을 알아보니 자재를 아끼려는 목적에서 인근의 불탄 절집의 기왓장과 목재 등을 가져와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수막새에서 ‘옴’자와 함께 토속 민중 신앙에서 나타나는 도깨비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그 절집이 불탔을까? 향교가 세워지기 전 인근에 절집이 있었는데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도의 동헌 아전들이 절에 와서 손을 벌려 종이랑 뇌물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하다보니 옹졸한 스님네들 견딜 수 없어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절집을 불태웠다. 해서 청도 지역에선 대개 절집이 불탄 이유를 ‘절집의 빈대 등살에 못 견디어 불태웠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빈대란 인간 빈대인 아전을 빗대어 가리킨 말이라고 수막새가 소리 없이 당시의 절집 형편을 들려주고 있는 듯 보였다.

참고하면 ‘옴’은 우주, 곧 일체근본이며 광대한 핵심이라고 한다. 옴마니반메홈(Om mani padme hum)이라 하여 불교도인 티베트인이 항상 외우는 범어다.

청도군지에 실린 ‘중수청도학기’는 1485년 조선 성종 임금 10년 5월에 찬한 것으로 당시의 청도군수 이균(李鈞)이 허물어진 청도향교를 확장 중수하여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에게 중수기문을 청하여 선생이 찬한 것이다.

‘석존제 때 군수 이균이 향교가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스승을 존중하는 도리가 아니다”, “군수된 자가 잘못을 보고도 고하지 아니함이 가하겠는가? 곧 절 경내를 묶어서 중들이 새 사찰을 지으려고 기와를 구워서 지붕을 덮지 않은 것과 옛 사찰을 응당히 무너뜨리지 않은 것을 모두 실어 와서 기와로서 지붕을 새롭게 하고 재목으로서 그 집을 수선하니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공사를 끝 마쳤다. 옛날 태원(중국의 지명)의 왕중서관찰(王仲舒觀察)은 강남의 관찰사가 되면서 절집을 무너뜨려서 공청(公廳)의 집을 수선했던 창여 한유가 오히려 장한 일을 했다고 했다. 지금 이 군수가 절집을 허물고 이로써 학교를 수선하게 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아니하는 일념에서 나왔으나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우리의 도를 도우는 데 사용했으니 그 백성을 번거롭게 아니 하는데 마음을 두는 것은 또 사문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까닭이니 옛날에 이르는바 조치가 마땅함을 얻었다 할 것이니 진정으로 이같이 사군이 이 거사를 하는 것은 또 왕홍중 보다 한 등급을 더 했다고 하리로다(생략)’

하긴 모든 종교는 한 길로 향한다고 했던가? 아무튼 정몽주를 앞에 두고 이방원이 읊조린 하여가(何如歌)가 생각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세상이치는 승자의 아전인수(我田引水)에 기댄 채 흘러간다. 기왓장을 두고 굳이 중국의 예를 빌려와 합리성을 얻으려한 그 궁색함에서 힘이 있는 자들의 어떤 모범 변명을 보는 듯하다. 옴마니반메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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