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 원효, 정몽주, 겸재, 박맹우가 만난 암각화
갈문왕, 원효, 정몽주, 겸재, 박맹우가 만난 암각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0.16 2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라중기 입종갈문왕과 원효대사, 고려말기 포은 정몽주 선생, 조선중기 천재화가 겸재 정선이 울산 대곡천 암각화를 보았다. 그렇지만 암각화가 내포한 세계적 가치를 발현시키지 못했다. 지금 박맹우 울산시장은 앞선 여러 인물처럼 암각화 앞에 섰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 뜸을 들이고 있다.

암각화를 맞닥드리친 것은 역사의 거울에 비춰지는 엄중함이 있다. 하기에 따라 역사적 기회일수도 있다. 과거 암각화 앞에 섰던 인물들을 되돌아보면 오늘 박 시장의 처신이 미래에 어떤 관점으로 비춰질지 예상할수 있다.

한번 돌아보자.

서기 525년 천전리 암각화 앞에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과 법흥왕비가 섰다. 기하무늬와 동물상이 새겨진 바위를 기이하게 여기면서, 왕족들의 이름과 놀다간 사연을 기록했다. 만약 놀이나 이름을 새기는데 골몰하지 않고 기하무늬와 동물상에 대한 해석을 남겼다면 인류최초의 암각화 해설이 됐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선사 암각화 개념이 없었다. 선사 암각화는 1860년대 스페인 알타미라에서 처음 발견돼 학술적 의미가 부여됐다. 그러므로 신라인의 판단이 미숙했다고 나무랄수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

7세기 인물인 원효대사는 암각화 바로 옆 반고사에 머물면서 반구대와 천전리 두 개의 바위그림을보게됐다. 대사는 암각화 동심원 그림에서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사유를 포착했을 지언정 암각화 그 자체에 대한 해석론은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6~7세기 신라인들이 암각화 의미와 존재를 기록하고 그 내용이 석굴암이나 다보탑처럼 전승돼 왔다면, 우리의 교과서에 있는 알타미라 동굴벽화 대신 대곡천 암각화가 세계의 교과서에 실렸을 수 있다.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고려말엽 포은 정몽주가 이곳에 들렀지만 암각화에 대한 기록은 없다. 1375년 언양에 유배된뒤 이곳을 들렀다. 포은 선생은 술과 경치, 여색 등 온갖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지었다. 그런 호방하고 학식 깊은 포은도 반구대 경치만 구경했는지, 암각화에 대한 기술이 발견되지 않는다.

포은이 암각화의 존재와 해석을 글로 남겼다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경과 결합해 세계적 문화심볼이 됐을 수 있다. 혹은 조선시대 활발했던 금석문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가치를 벌써 인정받고 오늘처럼 암각화가 물에 빠지는 수모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포은이 지방민으로부터 이상한 그림이 있는 바위가 두 곳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확인한뒤 깊은 학식으로 들여다본 글을 남겼다면 세계 선사미술계의 태두가 됐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암각화 연구자나 관리자들이 기발한 착상으로 암각화세계를 전개한다면 훗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문화영웅이 될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서기 1700년대 전후에 활약한 겸재 정선 선생도 이곳에 왔다. 천재 화가인 그도 반구대의 기암과 계류만 그린 화폭을 남겼을 뿐 암각화에 주목한 흔적이 없다. 겸재가 만약 선사인의 그림세계에 깊은 시선을 돌렸다면 조선의 회화세계가 큰 변화를 맞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서기 1713년쯤 반구대 맞은편 기슭에 경주 최씨 일가가 ‘집청정’(集淸亭)이란 공부방을 차렸다. 이 공부방이 지어진 뒤 200여년간 시인 260명이 다녀가면서 406수의 시문을 남겼다. 울산대 성범중 교수가 이 시문을 분석한 결과 허구많은 시인묵객들은 반구대 암벽에 새겨진 학(鶴) 한 마리와 바닥에 새겨진 바둑판에 대한 노래를 읊었으나 암각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음풍농월에 심취했고 이치를 따져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연댐을 건설하던 1960년대는 암각화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채 무심히 넘어갔고, 마침내 1970년 암각화가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그것도 우리 스스로 물속에 침수시켜버린 위중한 형태다. 그 앞에 박맹우 시장이 대표적으로 섰다.

6세기, 14세기, 18세기 인물들은 선사인이 넘겨준 위대한 유산의 가치를 발현시킬 기회를 놓쳤음을 살펴봤다.

이 시대 우리는 저 유산을 앞서간 인물처럼 그렇게 넘길지, 아니면 세계에 우뚝할 새로운 문화코드를 창출할지 막중한 임무를 받은 것이다.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