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아프리카에 가다’
‘김소월, 아프리카에 가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0.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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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오전, 565돌 한글날을 맞아 한국방송공사가 내보낸 특집방송 하나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제목은 ‘김소월, 아프리카에 가다’였다.

무대는 오랜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콩고민주공화국 동쪽 끝의 ‘고마’라는 도시. 이곳 3개 대학교 학생들이 한국행 어학연수 티켓을 따려고 한국시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한 달의 과정을 담은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였다. 최종 선발된 두 학생에게는 한국의 자매결연 대학교에서 무료로 한국어를 배우는 특전이 예약돼 있었다.

한국시 이해를 위한 첫 강의 소재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였다. 시의 밑거름이 된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상황은 80여년 식민 지배를 경험한 콩고 대학생들의 정서를 어렵지 않게 파고들었다.

난생 처음 접한 한국시를 붙들고 씨름한 학생은 자그마치 357명. 한 팀 2명만 가려내는 시험에 경쟁률은 180대 1을 기록했다.

OX 퀴즈를 거쳐 선발된 마지막 도전자는 3팀 6명. 한 팀은 천상병의 ‘귀천(歸天)’을, 다른 한 팀은 김용택의 ‘콩, 너는 죽었다’를 택했다.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한 ‘퍼시픽-프랑스와’ 팀이 고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였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퍼시픽 팀’의 한국시에 대한 이해력은 현지 한국 교수진도 감탄할 정도였다. 연탄재를 본 적도 없는 그들은 대신 ‘숯’을 영상에 담아 안도현의 시 정신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콩고에서 흔한 ‘쇠똥’을 ‘연탄재’에 접목시켜 그 의미를 재구성해내기도 했다. 잔잔한 감동이었다.

하지만 더 진한 감동은 또 다른 등장인물들-현지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는 한국인 여교수와 콩고인 교수-과 구성작가의 입에서 나왔다.

한 달 가까이 선발 과정을 죽 지켜봤던 구성작가의 내레이션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소월의 시는 역사로, 역사는 다시 시로 이어진다. 만약 식민통치 하에서 한글이 사라졌다면 어땠을까? 한국처럼 식민통치를 당했던 콩고민주공화국.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콩고 대학생들은 여전히 자신을 지배했던 나라의 문자로 소통한다.”

콩고인 교수도 몇 마디 거들었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콩고는 8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다. 내 생각에는 80년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교육제도나 정치제도에서 서양의 영향을 아주 심하게 받고 있다.”

“콩고 글씨는 있는데 안 가르쳤다. 가르칠 수도 없었다. 왜? 벨기에 아니면 서양국가에서 쓰는 글씨를 같이 쓰면 서양사람 같이 될 수 있다는 느낌(기대)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아주 잘했다. 자기 글씨(한글)도 만들었고. (그래서) 중국 영향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한국문화도 가르치고, 세계적으로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구성작가가 다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문자는 그 공감을 사람과 사람 사이로 실어 나른다. 고유의 문자가 중요한 이유다.”

“한국처럼 식민통치를 받았던 콩고.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지배했던 나라의 언어로 소통한다. 고유문자가 사라진 콩고의 엘리트들은 여전히 프랑스어나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네 번이나 나왔지만 아프리카의 고유문자는 잊혀졌다. 한 민족의 문화적 역량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잣대는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한글이 만들어진 지 535년. 콩고란 낯선 땅이 이 오래된 질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어학연수생 선발 과정을 이끌었던 한국인 여교수가 소감을 말했다.

“콩고 대학생들은 이번 한국시 번역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한국어를 알게 되면서, 자기네 나라 글이 없는 것에 대한 고민을 좀 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바도 바로 그런 것이다.”

특집프로그램은 ‘갈잎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했고 서툰 우리말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통기타 리듬에 맞춰 부르던 콩고 대학생 둘의 모습을 마지막 영상에 끌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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