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0.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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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2일 오전 한국방송공사(KBS)의 퀴즈 대한민국이 주관식 질문을 하나 던졌다. 상금 3천500만원을 걸고 홀로 결선무대에 오른 당찬 여성은 진해에서 올라왔다는 아줌마였다. 그녀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답을 댔다. “정답은… 주 시 경.”

주어진 힌트 가운데 하나는 “한글이 목숨이라는 글을 남긴 한글학자는?”이었다. “틀렸습니다.” 진행자가 정답을 풀었다. “최 현 배 선생입니다.”

최현배 선생과의 남다른 인연은 10대 때에 맺어졌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의 한글문법 교재 둘 다가 신기하게도 선생의 혼이 담긴 ‘말본’이었던 것이다. 그 말본 속에서 만난 이름씨(명사), 움직씨(동사), 그림씨(형용사), 어찌씨(부사)와 같은 순 우리말로 된 품사 이름들은 아직도 내 마음의 밑바닥에 마르지 않는 샘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국한혼용(國漢混用)을 주장한 국어학자 다수의 입김과 그들의 영향력을 따라간 문교당국의 정책변화로 지금은 그 흔적조차 거의 사라지고 없으니, 아쉬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인자하고 평온한 모습의 선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서였다. 부인과 함께한 인터뷰 자리였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선생은 막힘이 없이 “패티 킴”이라고 답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 동안이나 모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선생에게서 그런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병영’이란 마을의 울타리 안, 울산시 중구 동동 613번지 생가 터 옆의 외솔기념관에 한 번이라도 가 보셨는가. 여기서는 선생의 것으로는 매우 드물다는 친필 붓글씨 한 점을 만날 수 있다. 바로 <한글이 목숨, 최현배>란 글씨다.

선생의 생가 복원과 그의 호를 딴 ‘외솔기념관’의 건립에 결정적 도움을 준 분들이 있었다. 선생의 모교 후배들인 몇몇 병영초등학교 동문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9호(2001년 12월 20일)로 지정만 되었을 뿐 돌보는 이 하나 없었던 생가 터에다 제대로 된 생가를 복원해 보자는 염원을 그들은 차마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그들의 제안을 현실의 논의 무대에 올려놓은 이는 김기환 전 시의원이었다. 그의 끈질긴 설득은 재력가인 김 철 중구문화원장(전 외솔 생가 복원 추진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두 김씨의 굳은 악수는 마침내 선생의 40주기에 맞춰 울산의 새로운 자존심을 잉태하는 쾌거로 이어진다.

올해는 한글이 반포된 지 565돌이자 외솔기념관이 세워진 지 한 돌이 되는 해다. 그러나 한글날을 겨우 며칠 앞두고도 외솔을 기리는 사업에 대한 홍보는 감감무소식이다. 외솔기념관이 모처럼 (동원된) 학생들로 북적인다는 뉴스 정도가 고작일 뿐이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울산시가 책임질 일이 별로 없어서일까.

거리마다 깃발이 나붙고 요란스럽기조차 했던 태화강축제며 고래축제, 한우불고기축제 같은 행사의 홍보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한 예술단체의 십리대숲 납량 이벤트에 보여준 지대한(?) 관심이나, 1회성에 그친 세계옹기문화엑스포에 그토록 기울였던 광적인 선전에 비하면 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 대접인가. 혹자는 이 지역의 문화 수준을 빗대어 말한다. 혹자는 공직자들의 문화에 대한 마음가짐(문화 마인드)을 문제 삼기도 한다. 한글학회를 20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위대한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외솔 선생이 지하에서 이 일을 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선생의 고향에서 다시 맞이하는 565돌 한글날의 감회는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선생의 크나큰 업적을 다 함께, 그리고 더 크게 기리는 날이 올 것을 목말라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선지자는 오히려 고향에서 외면을 당한다”는 성서의 격언을 굳이 우리 울산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선생에 대한 학계와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 일부를 인용한다.

“선생은 1910년 국어강습소에서 주시경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암울했던 시절에도 ‘한글이 목숨’이라고 외치며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일생을 바쳤다. 말본의 체계를 확립하였고 한글 전용 운동에 힘썼으며,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로서, 국어와 한글 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로서, 민족의 중흥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친 교육자로서 남긴 업적과 공로는 크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그 의지는 민족사의 한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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