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는 바위그늘·에코현상·三界공존·재생반복 갖춘 경이로운 장소
반구대는 바위그늘·에코현상·三界공존·재생반복 갖춘 경이로운 장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6.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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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한 암벽은 빛을 받고 낙숫물 방지에 적격
움푹한 공간은 되울림 소리 퍼지는 효과적 위치
대곡천 삼각형 산 그리고 하늘은 俗에서 聖으로
햇빛이 쪼이고 사라짐 물이 들고 빠짐으로 재활
그동안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 몇 가지 공간적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바위그림 유적지가 주로 바위그늘을 이루고 있는 점과 에코현상을 비롯한 소리 증폭 현상이 관찰되는 점, 삼계가 하나의 축으로 응축된 공간으로서의 우주산(世界山)과 우주강(世界江)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점, 특정한 계절과 시간대의 햇볕 및 물(홍수)의 들고 빠짐 등에 따라 되풀이하여 형상들이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는 점(재생의 반복) 그리고 바위그림 유적지가 대부분 이쪽(지상계, 俗의 세계)과 저쪽(천상계, 聖의 세계)의 경계지점에 위치하는 점을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몇 가지의 입지 조건들은, 그것들이 일시적이며 특별히 한정된 유적지에서만 살펴지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일관성을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와 같은 현상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시아 등 전 대륙에서 동일하게 관찰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와 카렐리야 지역, 톰이나 예니세이 강변, 레나 강변, 몽골의 고비알타이나 알타이 산록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그와 같은 공간 조건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세계 각지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동일한 공간적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은, 선사 및 고대의 화가들이 특별히 그와 같은 곳을 선택하였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살펴지는 가장 보편적인 공간적 특성은 경계 또는 완충 등 중간지대의 성격을 갖춘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안(동굴, 속, 실내)과 바깥(한데, 겉, 실외)의 중간 지점(바위그늘)이며, 이쪽과 저쪽의 경계지점이고, 하늘과 땅 또는 땅과 물 등의 이질적인 세계 사이의 완충지대이다. 그러한 점을 바위그늘과 우주산(우주강), 경계지대 등의 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위그림 유적지는 형상들이 반복적으로 재생을 되풀이 하는 곳이다. 그곳은 햇볕과 홍수의 들고 빠짐 등 자연 현상에 의해서 그의 온전한 모습이 사라졌다가 되살아나는 공간이다. 어둠(밤)이나 홍수 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추거나 사라지게 하는데, 그것은 상징적으로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을 죽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하자면, 있다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며, 보이지 않다가 보이는 것은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침이건 혹은 백야의 늦은 밤이건 간에 햇볕을 받아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은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잠겼다가 드러나는 것도 또한 죽은 것이 다시 되살아 난 것이다. 빛에 의해서 또는 물의 들고 남에 의해서 형상들이 죽고 또 살기를 되풀이하는 곳, 즉 재생이 반복되는 곳이 바로 바위그림 유적지이다.

바위그림 유적지의 공간적 특성 가운데 또 하나는 소리를 통한 정보전달의 효과가 강한 곳이다. 바위그늘과 병풍처럼 이어진 바위, 뒤가 높은 담처럼 막힌 곳, 앞으로 흐르는 물 등은 서로 어우러져 소리를 가두고 또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에코현상은 그곳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간의 신비감을 증대시켜 준다. 메아리처럼 여운을 남기며 되돌아오는 소리는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그다지 관찰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런데 바위그림 유적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리의 증폭현상이 어렵지 않게 관찰되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거행되는 비의(秘儀)와 그 과정에서 되돌아오는 소리의 긴 여운들은 사람들의 희구에 대한 신들의 대답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한실 마을 앞 ‘건너각단’에 위치해 있다. 그림은 대곡천의 수면을 경계로 삼아 피라미드처럼 우뚝 솟은 산의 병풍처럼 이어진 바위에 그려져 있다.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바로 위는 특이하게도 지붕의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와서 바위그늘을 이루고 있다. 그림이 집중된 암면의 앞은 바위가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대곡천과 맞닿아 있다. 대곡천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아홉 개의 구비(九曲)를 이루고 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너각단으로는 물을 건너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대곡리 암각화 유적지에서 그동안 살펴보았던 바위그림 유적지의 공간적 보편성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피라미드처럼 솟은 산은 대곡천의 물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바닥을 기반으로 삼아 병풍처럼 꺾어진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으며, 산의 중간 지점에서 앞으로 처마처럼 튀어나온 바위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그것은 비바람과 눈보라로부터 그림을 보호한다. 바로 이 처마처럼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대곡리 암각화는 수 천 년의 기나긴 시간 동안 모진 풍상을 이기고 오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대곡리 암각화 유적은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다. 바위그늘은 안과 바깥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곡천을 기반으로 솟아 있는 산은 완벽한 피라미드 모양을 이루고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이 산은 우주를 구현해 놓고 있는 셈이다. 하늘, 산, 땅 그리고 물이 하나의 축으로 응축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스스로 우주산을 구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아홉 개의 구비가 휘돌아 흐르는 대곡천도 또한 스스로 우주강이 되었다.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후대의 누군가가 아홉 개의 구비에 각각 ‘곡(曲)’을 새김으로서 우주강은 보다 분명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림은 물과 맞닿은 바위에 그려져 있다. 그림이 그려진 바위는 산과 물이 만나는 경계지점이고 또 물과 하늘 사이의 완충지대이다. 두 세계의 중간지점, 즉 그림이 그려진 암면에는 이른 봄 오후의 늦은 시간에 햇볕이 짧은 순간 들었다가 사라진다. 바로 그 순간, 이 암면의 형상들은 긴 잠에서 깨어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날부터 해가 길어지면서 빛이 형상들을 희롱하는 시간도 점차 늘어난다. 그때 우리들은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이 전해주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엿들을 수 있다. 날이 길어짐에 따라서 암면에 빛이 머무는 시간은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 이후 다시 낮의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바위그림도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동지를 기점으로 날이 다시 길어지면서 대곡리 암각화도 그에 따라서 기지개 켜기를 되풀이했음을 이 유적지의 공간이 증언해 주고 있다. 또한 사연댐으로 수면 속에 잠기기를 되풀이 하는 이 암각화가 아주 먼 과거에는 홍수 때문에 수면 아래로 잠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먼 옛날의 대곡리 암각화 제작 집단이 그림을 그렸을 그때에도 홍수 때문에 그림이 죽고 또 되살아나기를 반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그리고 이 암각화 유적지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 그 소리들이 울리고 또 메아리 되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지의 갖추고 있는 공간적 특성, 즉 바위그늘과 피라미드처럼 솟은 산, 병풍처럼 꺾어지면서 계곡을 따라 늘어선 바위들, 긴 띠를 이루며 흐르는 물 그리고 그 앞으로 터널처럼 길게 패인 골과 그 외곽을 둘러싼 나지막한 산들이 이곳에 신비로운 에코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산과 계곡과 바위들이 소리를 머금고 있다가 다시 내뱉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 암각화 속에 깃들어 있는 영들의 속삭임처럼.

선사 시대의 대곡리 암각화 제작 집단과 그 화가들은 바로 이와 같은 공간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건너각단을 선택하여 그들의 생각과 그들이 육안과 심안 그리고 영안(靈眼)으로 보았던 세계와 그 주인공들을 형상화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조형언어를 통하여 이질적인 세계와의 소통을 꾀했으며, 그들의 신화와 이상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공유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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