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김대중 정부에의 참여
《제112화》 김대중 정부에의 참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2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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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나의 대통령 비서실 근무는 타고 난 어떤 인연이 있었던가 싶다. 전두환 대통령 때, 교육문화수석 비서관을 맡으며 ‘진백벌진(秦伯伐晉), 제하분주(濟河焚舟)’했던 결의로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직하며 나랏일에 전념했는데, 비록 정문연(精文硏) 원장이지만 다시 한 번 새로운 결의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날이 생생히 기억되는 것은 전 국무총리이었던 노재봉 박사를 정문연에 초빙하여 교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으로서의 예의로, 세미나에 끝까지 참여하여 배웅까지 해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급히 외출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으로부터 좀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노 전 총리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의 모 처에서 박지원 수석비서관을 만났다. 그는 만나자 마자, 수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통령님께서 이 원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학계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학자로 보내고 있는데… 여기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온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연구원 교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연구 과제를 구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와중에 자리를 옮기면 정문연한테 미안하게 됩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이제까지 주로 대학에만 있었기 때문에 ‘정치인맥’이나 ‘정치판’을 잘 알지 못합니다. 대통령님을 제대로 보좌하려면 뭐 그런 걸 좀 알아야 할 텐대요?’라며 박 수석의 얼굴을 살폈다.

‘아, 그런 것은 우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 8시경에 어른께서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거실 것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하여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당시 신대방동 우성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들이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축하 화분도 현관 앞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첫 출근하는 날 저녁에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성 펜타곤이 공격당하는 9. 11 테러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첫날부터 한 밤중에 비상이 걸렸다. 박지원 정책기획 수석, 유선호 정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 김하중 외교안보수석, 조영달 교육문화수석, 이태복 노동복지 수석, 김학재 민정수석, 박준형 공보수석, 전병현 상황실장 등 여러 비서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다음날 아침에 발표할 국민담화문의 내용에 대한 초안(요지)을 전달 받아서 공보 수석에게 연설문 작성을 지시했다. 국가안보회의 소집을 마치고 나니 비서실장의 업무가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비서실장의 일상적인 임무는 여러 비서실의 작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별로 없는데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대통령께서 민주당에서 탈당하시겠다고 하였을 때, 민주당원들과 국회의원들의 동요를 진정 시키기 위하여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하나 더 첨가하면 대통령 임기 말에 생기는 권력 누수현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당의 개혁을 주장하거나 특정인의 배척을 요구할 때, 이 주장과 요구를 정확히 수집하여 가감 없이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을 비서실장이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성실하게 하였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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