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운명(運命)이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운명(運命)이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2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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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Symphony No.5 in C minor, Op.67 “Schicksall”)은 별칭으로 ‘운명’이라고 불린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때문이다. 그의 제자이며 베토벤의 전기(傳記)로서 유명한 신틀러가, 하루는 이 곡의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테마의 뜻을 물었더니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하면서, 힘찬 몸짓까지 하였다고 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다다 다-’로 나온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과 혼동하다가 분명하게 구별될 즈음이 되면 운명도 제자리로 돌아간다.

필자에게는 전화 소리가 이렇게 울린 일이 있었다. 당장 사무실로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지인의 명령이었다. 운명적이었다. 그때 그냥 미국에서 친구들 만나 노닥거리고 있었으면 이런 전화 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금쯤 복덕방에 나가 고도리를 치거나 바둑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가 퍼져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은 ‘운명’이라는 극적(劇的)인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 그것이 인기를 높이는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베토벤의 비통한 생애와 너무나도 잘 통하는 말이 된 때문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이 ‘다다다다-’ 하고 문을 두드리는 동기(動機)는, 베토벤이 비인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들은 새소리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독창적으로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엄격히 말해, 예술에서 창의성 자체는 가장 중심이 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괴롭고 아픈 시간을 견디며 수없이 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나오는 결과인 것이어서 ‘무슨 새소리냐?’가 맞는 말은 아니다. 순수한 창작은 없기 때문이다. 어설픈 예술가가 자기기만(自己欺瞞)과 위선적인 행동으로 표절과 창작을 혼동하게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음악학자 리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향곡은 끝악장(4악장)을 목표로 진행되며, 전체가 그렇게 계획된 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분석은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제 1악장 서두의 ‘다다다다-’라는 모티프가 이 악장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3악장에서도, 제 4악장의 재현부 직전에서도 변형되어 나타나서 전 악장을 튼튼히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슈만은 이 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외경(畏敬)과 경탄이 새로워진다. 이 교향곡은 음악의 세계가 계속되는 한, 몇 세기(世紀)고 간에 남을 것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08년(38세)이다.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대개 ‘제 3번-영웅’을 완성한 직후인 1804년 무렵부터 진지하게 손을 댄 것으로 보고 있다. 악상(樂想)이 떠오르고 이것을 오선지에 옮기는 기간이 4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성격으로 보아 수도 없이 고치고 새롭게 넣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작곡에서만큼은 완벽주의자였다.

짐작건대 지금 베토벤이 살아서 이곡을 다시 듣는다면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느 부분을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한테서도 나온다. ‘소나기’를 그렇게도 고쳤고, 또 고치고 싶어 하였다.

‘돋보기’가 울산제일일보에 태어난 것은 운명적이었다. 이런 운명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만남(coincidence)을 말할 때 적절하게 쓰인다.

씨줄은 KBS와의 인연(因緣)이 특정 인물과의 인연(人緣)으로 계속되고 있었던 줄이고, 날줄은 정년을 하고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아서 울산에 남아있었던 줄이다. 이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운명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운명은 언제나 과거를 돌이킬 때 나타나는 것이고, 미래를 예상할 때는 희망이 자리를 차지한다. 울산제일일보의 발전을 위한 희망을 운명적으로 품어본다. 사실, 비전(vision)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내는 예술이다. 예술가적 열정으로 창작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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