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인은 그림 새길 곳으로 처마있는 바위그늘 선호
선사인은 그림 새길 곳으로 처마있는 바위그늘 선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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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피해 오래 보존하고 작업하기 좋은 공간
몽고·러시아 유적지마다 비슷한 여건 확인
천전리·반구대 암각화도 윗부분 튀어나온 곳
이 미 오래 전에 읽었던 선사미술 관련 글 가운데 바위그림을 ‘암음(岩陰) 미술’로 표기한 것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암음’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저자의 의도를 완벽히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암벽화’나 ‘암각화’라는 용어들이 있는데, 왜 굳이 ‘암음’이라는 말을 썼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암음’을 풀어쓰면 ‘바위그늘’이 되며, 그렇다면 ‘바위그늘 미술’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직접 바위그림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암음’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던 그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의 그는 제작기법이나 그림의 의미 등의 문제 보다는 그림이 그려진 공간을 주목하여 그 말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96년 여름! 그러니까 햇수로는 어느덧 15년이 흘러갔다. 나는 그해 여름부터 4년간 예니세이 강을 중심으로 한 남부시베리아의 하카스코 미누신스크 분지 일대의 바위그림 유적지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첫 번째 여름을 하카시야 자치국 서북쪽의 페치쉐 강변 일대에 분포하는 암각화 유적지들을 조사하였다. 페치쉐는 쵸르느이 이유스 강과 합수하여 거대한 예니세이 강으로 흘러드는 조그마한 샛강이다. 강변을 따라 술렉크와 페치쉐 그리고 샬라비요프 등 몇몇 암각화 유적지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매일 아침에 조사 장비와 더불어 점심용으로 빵 한 덩어리와 비스킷 몇 조각 그리고 물 등을 준비하여 이 페치쉐 강변 일대의 암각화 유적지들을 차례대로 뒤지고 다녔다.

조 사를 하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되는데,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모두 모험이자 또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허기와 갈증을 달래며 혼자서 이산 저산 그림을 찾아서 헤매던 일이나, 키만큼이나 높이 자라 앞이 제대로 안 보이던 야생의 초지를 헤치고 다닐 때의 두려움,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발톱에 피가 맺히게 오르고 또 내리던 급경사의 산비탈, 시간에 쫓기고 모기에 뜯기며 크고 작은 바위에 그려진 형상들을 하나하나 채록해 내던 일들, 조사 후 야영지를 되돌아 갈 때의 그 무거웠던 발걸음 등. 가끔씩 그 때의 일들을 회상하면, 열정 하나 때문에 용감했던 나의 젊은 날들의 소중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용담으로 뒤바뀌어 있다.

돌 이켜 보면, 당시에 나를 곤혹스럽게 하였던 일들이 어디 그것들뿐이었겠는가? 시베리아에서의 조사 기억 중 또 한 가지의 어려웠던 일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한 적응이었다. 때로는 살갗을 태울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다가 또 갑자기 급변하여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빨이 딱딱거리며 온몸이 덜덜거릴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비가 내릴 때면, 야영지로 돌아가기는 너무 멀고 또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그림이 그려진 바위그늘에서 날이 개기를 마냥 기다리곤 하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림이 그려진 바위그늘만한 곳이 없었다. 제법 줄기가 굵은 비가 한동안 내려도 비에 젖지 않고 앉아서 휴식도 취하고 또 그치면 조사를 이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림이 그려진 바위그늘이었던 것이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나는,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일들을 떠올리며 시베리아의 긴 여름 낮을 보내곤 하였다.

언젠가 그날도 나는 페치쉐 암각화 유적지를 조사하다 비를 만났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새삼스럽게 그림이 그려진 공간을 이모저모 뜯어보게 되었는데, 위가 꼭 지붕의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비에 젖지 않을 수 있었으며 또 바람도 막아주어 잠시 지내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좌우로 이어져 있는 바위는 때로는 각을 이루며 꺾어져 마치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은 구조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림은 주로 이러한 공간 속의 바위표면에 그려져 있었다. 주변에 바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위가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 주로 중요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비 가 그친 뒤에 바위 표면과 그곳에 그려진 그림의 상태를 하나씩 살펴보았는데, 바위그늘 아래의 암면은 마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출된 바위와는 달리 그 표면은 깨끗하였으며, 그림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냥 노출된 바위는 내린 비로 표면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또한 이끼가 많이 자라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바위 표면은 균열이 나 있기도 하였다. 특히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이끼로 인하여 훼손이 심하게 진행된 곳도 있었으며, 어떤 곳은 형태조차 살피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확인하면서 나는, 선사시대의 화가들이 바위그늘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한 나의 의문은 얼마가지 않아 곧장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그 까닭은 인근의 술렉크와 샬라비요프 등을 조사하면서 이들 두 유적지도 같은 상황임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 두 곳뿐만이 아니었다.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 내의 많은 바위그림 유적지들에서도 역시 바위그늘이라는 동일한 입지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니세이 강변의 바야르 산맥과 오글라흐트이 그리고 안친촌 등지의 주요한 암각화 유적지에서도 거듭 거듭 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멀리로는 톰 강이나 레나 강변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도 바위그늘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미 이전에 조사하였던 몽골의 몇몇 암각화 유적지들도 그랬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런데 비단 시베리아나 몽골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바위그림 유적지가 같은 상황이었음을 각종 보고서와 자료집을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멀리는 서유럽 각지의 바위그림 유적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탓실리 아제르,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대륙의 바위그림 유적지들이 바위그늘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바위그늘의 크기는 유적지마다 달랐지만, 그러한 공간이 선호되었음을 수많은 사례들로써 충분히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바위그늘에서 반복적으로 선사 및 고대인들의 그림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곧 그와 같은 곳에 우연히 그림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제작자들이 그러한 곳을 특별히 선정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로써 ‘바위그늘’이 바위그림 유적지의 공간적 특성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구대나 천전리 바위그림 역시 이같은 구조로 공간이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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