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비밀 풀 사슴문양 2개 부산해안서 출토
대곡리 비밀 풀 사슴문양 2개 부산해안서 출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4.24 2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3년 발견 하인수 박사 “확인하는 순간 손이 떨렸다”
분석연대 기원전 3200년전 암각화 제작시기 추정 가능
작은 사슴형상 토기파편은 선사시대 미의식 읽을 단서
2003년 어느 날 인터넷 뉴스를 통해 부산 동삼동 패총 속에서 사슴 무늬가 새겨진 토기 파편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사진과 함께 소개된 기사의 요지는 이 파편 속의 사슴 형상이 대곡리 암각화의 편년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진 속의 토기 파편에는 선으로 간결하게 그린, 그러나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 최초의 모습을 잃은 사슴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대곡리 암각화의 양식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관련 기사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주목을 끌었던 것은 이 토기가 출토된 문화층의 편년이었다. 그것은 기원전 3200년 무렵이라는 비교적 분명한 연대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 5월, 나는 대곡리 암각화 속의 형상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채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서 새로운 도면을 제작하였고, 또 그동안 이 암각화를 두고 제기되었던 많은 견해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 암각화에서 면 쪼기로 그려진 형상들이 먼저 그려졌으며, 그 다음에 선 쪼기로 그려진 형상들이 덧그려졌다는 주장에 대한 재검토였는데, 조사 과정 및 결과를 토대로 형상들의 제작 층위를 분석한 결과 이 그림에서 제일 먼저 그려진 것은 소위 ‘선 쪼기’로 그려진 배들이었으며, 그 위를 면 쪼기의 고래와 절충식 쪼기의 고래나 호랑이 등이 뒤덮었고, 다시 그 위에 선 쪼기의 호랑이 등이 보다 강하게 쪼여져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이 암각화 속 제재와 형상들의 양식을 분석하는 데에도 큰 작용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은 네 겹의 덧 그려진 부분들이 있으며, 이는 각 형상들이 시기를 달리 하며 최소 네 차례 이상의 덧그리기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가장 먼저 그려진 형상부터 제작 순서대로 그림들을 배열하면, 이 암각화에서 제재와 양식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중에서도 가장 발전된 시기에 제작된 형상의 양식상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발전된 시기의 양식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그것이 곧 ‘대곡리’식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며 그 제작시기를 논하였는데, 문제는 그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 자료들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원삼국시대까지 낮춰 본 연구자는 고래가 뿜는 수증기의 모양이 일본의 동탁에 그려진 것과 같고, 또 한나라 시대의 노(弩)와 유사한 형상이 그려진 점, 제작 도구가 철기로 보이는 점 그리고 X-레이 기법을 이용한 점 등을 근거로 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나름대로 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합당한 비교대상인지, 그 밖의 자료는 없었는지 등의 검토가 없는 연구도 있었다.

어느 시대이건, 조형예술 속에는 그것이 제작되었던 시대의 생활상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어떤 특정 시대의 삶이란 동시대의 사람들이 꾸었던 꿈과 보편적인 가치관들의 총화이며, 그런 까닭에 각 시기별 조형 예술 속에는 주어진 시대의 독특한 미감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연현상을 두고 얻어낸 동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이 조형예술 속에서 지속적이고 또 일관성 있게 표출될 때, 우리는 특정한 시대의 양식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회화나 조각 등의 장르를 불문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특성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 피라미드 속에 그려진 도상들이고, 스키타이 동물양식으로 표현된 동물 형상들이다.

대곡리 암각화의 양식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첩된 형상들의 선후 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1기, 2기, 3기 등의 제작 시기 구분을 하였으며, 각 시기별 양식상의 특징을 논하면서 ‘대곡리’식 양식의 특징을 추출해 낸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암각화에 한정된 것인지 혹은 동시대의 한반도에서 제작된 조형 예술의 보편적인 양식이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양식이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 지 등의 문제를 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반도에서 대곡리 암각화와 직접 견줄 수 있는 어떠한 조형예술품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연구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 채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접하게 된 소식이 바로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에 사슴 형상이 시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파편 속의 사슴 형상과 대곡리 암각화 속 사슴 형상들 사이에는 형태적으로 틀림없이 차이가 있지만, 동질성도 확인된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그것은 동삼동 패총 C 피트 5-1층에서 출토된 것이며, 이 층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는 기원전 3200년이라고 한다. 토기 파편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 그리고 두께가 8.7㎝×12.9㎝×1.5㎝이며, 불규칙하게 깨어진 토기 파편의 입술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다. 그것은 그릇이 깨어지면서 형상의 일부도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을 살피기 어렵지만, 분명히 사슴 형상 두 마리이다. 이들 사슴 형상은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앞의 것은 엉덩이 부분이, 뒤의 것은 머리와 몸통 그리고 앞다리 부분이 남아 있다.

이파편 속 사슴 형상의 발견 경위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의 토기 파편은 이미 1999년도의 조사 과정에서 수습한 것이며, 그때 수습한 파편의 양이 유물상자로 무려 3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사 후일담에 따르면, 당시 수습한 토기류들은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수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정리가 안 되었다고 하였는데, 2003년도에 묻어있는 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사슴 형상이 확인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이었던 하인수 박사는 이 파편 속에 그려진 사슴 형상을 확인하는 순간 ‘손이 떨렸다’고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발견자인 복천박물관 하인수 관장에 따르면, 사슴 형상은 뼈나 대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새긴 선각이며, 선의 두께는 2~3㎜ 전후라고 한다. 사슴 형상은 그 특징만을 추출하여 묘사하였기에 이미지가 간결하고 단순하다고 하였다. 그림의 제작 방식에 대해서는 머리와 목 그리고 몸통을 연결하는 윗선을 두 번에 걸쳐 길게 그린 후, 사슴의 뿔과 입 그리고 다리 등 특정 부위가 위치하는 곳을 가볍게 터치하여 사슴을 형상화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최초의 선 1/3지점에 수직선을 그어 목과 몸통을 구분하고, 몸통은 사다리꼴로, 뿔과 얼굴은 선으로써 형상화한 것으로 하인수 관장은 추측하고 있다.

하인수 관장이 피력한 것처럼, 이 사슴 형상은 대곡리 암각화의 양식과 편년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사슴 형상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대곡리 암각화 속 동물 형상과 직접 비교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 단서 하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 사슴 형상이 그려진 토기 파편이 출토된 문화층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는 대곡리 암각화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 토기 표면에 그려진 사슴 형상과 암각화 속의 사슴 형상의 양식적 특징에서 동질성을 확인하는 일은 ‘대곡리 식 캐논’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할 것이다.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