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서울대학 선비가 국보위로부터 호출을 받다(1)
《제81화》 서울대학 선비가 국보위로부터 호출을 받다(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1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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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3월, 나는 정신문화연구원 기획실장(겸 연구실장) 직을 끝으로 서울대학교로 돌아왔다. 선비가 되기로 마음잡고 학생지도와 연구에 집중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런데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이홍구 교수가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목적은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에 관한 것이었다. 정부의 경제·과학 심의회 장덕진 위원장으로부터 한국의 만성적 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진단과 처방(다각적 다학문적 연구(multi-disciplinary research))을 위해 수 천 만원의, 당시로서는 거액의 연구비를 주겠다는 제의가 있어서 그 돈을 받기로 했으니 함께 연구를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 연구소에는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연구소장인 이홍구(정치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김경동(사회학), 임종철(경제학), 이인호(러시아사), 길승흠(정치학), 안청시(정치학) 등 여러 일류학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여기에 내가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나의 연구 업무는 연구의 기본적 시각과 연구의 틀 짜기(frame work) 제안이었다. 바로 이어서 인터뷰를 통한 전국적 자료 수집활동과 보고서 작성이 이어졌다. 자료 수집은 전국적으로 10여개 지역으로 출장을 가서 시행되었다. 나도 직접 자료 수집에 나서 성심여대 학생들 5,6명을 이끌고 경남 하동지역으로 갔다. 자료수집 매뉴얼에 따라 매일 열심히 인터뷰를 했다. 당시 시골에는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자료 수집이 거의 끝나는 마지막 날에 갑자기 국보위로부터 나를 찾는 호출 전화가 왔다. 1980년 7월경이었다. 하동 근처 동네의 우체국으로 전화가 왔었다.

국보위에서 우리나라 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했으니 내가 발표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니 당장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 상경하여 그 다음 날 발표를 해야 했다. 너무 한 일이었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약 20분씩 발표할 내용을 원고지에 가득 써 와서 읽어갔는데 나는 원고를 준비할 시간도 없어서 그냥 발표할 내용의 요지만을 개조식(個條式)으로 적어 나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더 생동감 있었던 같다. 왜냐면 어제까지만 해도 현장에 나가서 인터뷰를 하면서 자료수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감이 철철 넘치는 생생한 내용이었다. 이때 KBS TV가 저녁 골든아워에 중계방송 형태로 요약하여 보도하였는데 내가 발표한 것만 약 20분정도로 전문이 나갔고 다른 발표자들의 내용은 2,3분 정도씩 아주 많이 줄여서 나갔다.

이 방송이 나간 다음 날부터 언론과 시민의 반응은 대단했다. 내가 한 말 하나하나를 신문사설의 제목으로 쓰기도 했고, 여러 잡지사로부터는 인터뷰를 요청했고, 각 신문사에서는 박스(box) 보도 기사 등이 10여 군데가 있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좀 쑥스러웠던 일은 다음 날부터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리고 세미나 토론에 참석하려고 기차를 탔는데 내가 지나가는 객차의 승객들이 나를 쳐다보며 소근대는 것을 직접 보고그냥 웃으며 지나간 일도 있다.), 어디 시장을 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는 않았지만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이 말하여 알게 된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청와대 초대 교육문화 수석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도 이 방송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서울대 사회연구소에서 같이 연구했던 김경동 교수의 회고담에도 이 경위가 자세히 나온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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