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1)
《제75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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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공무로 해외여행을 자주 다녀 보아서 미국여행이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나처럼 쪼들리며 힘든 유학생활을 마치면 유명한 곳들 몇 군데를 가보고 싶어 한다. 특히 미국의 동부에서 공부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귀국 길에 서부 쪽의 라스베이거스, 그랜드 캐니언,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에서 며칠씩 관광도 하며 해방된 기분을 즐긴다. 나는 이럴 겨를이 없었다. 9월 초에 시작하는 2학기에 다섯 과목이나 개설하여 학생들이 나의 귀국을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1970년 9월 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학위논문의 구두시험(oral test)을 마치자말자 책과 짐을 싸서 운송회사에 탁송하고 급하게 귀국 길에 올랐다. 그렇다고 서울에 머물 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혼할 때 처가에서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해주었었다. 처가 댁 어른들께 여간 염치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집을 서울사대 무급조교 시절까지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지탱하다가 처가에 맡기고 온 아이들 양육비, 미국의 생활비, 집사람의 미국에 오는 여행경비 때문에 팔 수 밖에 없었다. 귀국하여 어쩔 수 없이 임시변통으로 동대문에 있던 처가댁에 머물면서 살 집을 구하기로 했다. 급한 대로 용두동에 있는 서울사대와 가까운 곳에 조그만 전셋집(문간방) 하나를 얻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 아파트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서양 아파트를 신기하게 여겨 구경할 정도로 마포에 아파트 한 동이 있었고, 반포에 건설 중인 아파트 단지 하나가 있을 정도였다. 마침 대학과 멀지 않은 안암동에 아파트가 분양되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 생활의 아파트 경험이 있어서 단독 주택과 아파트를 크게 구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분양 받을만한 돈이 없었다. 지금이야 담담한 마음으로 고백하지만 미국에서 생활비를 절약하여 근근이 모았던 2~300달러를 카메라 케이스 속에 넣어왔다. 세관에 신고해야할 만큼의 액수도 아니었는데 그냥 공개할 수 없었다. 당장의 생활비로 써야 할 돈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물처럼 보관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파트 건설사 사장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무작정 사장을 만나서, ‘사장님, 저는 최근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상주입니다. 신학기부터 인근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 값을 일시불로 완납할 형편이 못 됩니다. 그러나 매달 월급을 받아 정확하게 지불하겠습니다. 저한테 아파트 한 채를 분양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부탁하였다. 사장은 어이없고 의아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가난한 서울대학교 교수이시군요. 그렇게 합시다.’라고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귀국한 다음 날, 안국동에 있던 ‘한국 행동과학 연구소‘로 나갔다. 정범모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큰 절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못하고,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나의 유학과 서울대 교수 임용에 커다란 도움을 주신데 대한 감사함을 올렸다. 이성진 소장도 만났다.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몇 년 동안에 연구소는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특히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연구 프로젝트를 받아서 경영에 커다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사정과는 전혀 다른 인구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연구소(East-west Center)와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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