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유학생활(9)
《제74화》 유학생활(9)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0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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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주점의 주주(株主)들은 이익이 생겨도 분배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것이 주도(酒道)의 하나라고 박수를 쳤다. 그리고 예상대로 젊은 손님들이 구름 때처럼 몰려들었다. 저녁마다 젊은 손님들이 북적거렸다. 손님들 중에는 여성들이 많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보수적 문화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담배도 마찬가지로 연노하신 할머니나 길가에서 피웠지 술집 작부(酌婦)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입술에 구찌 베니(루즈, 립스틱)를 바르는 것도 요즈음 표현으로는 유흥업소의 여자로 보일까봐 조심조심하였던 시절이다.

그러고서 ‘학사주점’이라는 제목의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어떻게 보면 학사주점이 한국 여성들의 보수적인 문화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문인, 기자, 예술인 여성들만 자유롭게 드나들던 이 막걸리 집을 이제는 일반 여성들도 좀 더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또한 한국문화의 보수성을 약화 시킨 또 하나의 계기는 술에 취해 약간은 객기가 들고, 여러 가지로 카타르시스 할 대상을 찾던 중에 학사주점의 벽은 좋은 낙서할 벽이 되었다. 여간 대담하지 않고는 말할 수없는 정치판에 관한 해학적(諧謔的) 표현이 낙서 속에 담겨있기도 하였다. 물론 짝사랑도 있었고, 이별의 슬픔도 있었고, 배신의 증오도 있었으나 모두 유머와 함께 녹아들어 있었다. 학사주점에서는 매일 벽에 모조 전지를 붙여놓고 낙서를 부추기기도 했다. 그래서 잘 된 낙서들을 오려 내거나, 그대로 베껴서 그 유명한 낙서전(落書展)을 열기도 했다.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주주회원들이 시화전(詩畵展)을 열기도 하였다.

누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이렇게 번창하는 학사주점이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주들의 친구들이 외상으로 술을 마시더니 이제는 ‘친구의 친구’들까지 외상술을 먹기 시작했다. 외상 빚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감당할 수 없는 단계, 신용으로 단골 재료 상으로부터 들여오던 술과 안주거리를 받아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내가 그 위원회의 수습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공군 각종 장교 교육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문규 회원이 자신 있게 나서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를 수습하겠다고 했다. 그가 나서서 학사주점을 세가 비싼 명동(유네스코 빌딩 뒤편)에서 조금 싼 광화문(현재 현대해상화재보험회사의 뒤편)으로 이사하였다. 이문규 신임회장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건장한 키에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공군에서 교육 받을 때, 각 구대장들이 군기를 바로 세운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곧 장교가 될 우리들에게 심하게 기압을 줄 때, 이문규 구대장은 가장 약하게 기압을 주었었다. 지나가는 말로 다른 구대장들이 기압을 주니까 자기도 어쩔 수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본심은 그렇지 않다고 할 만큼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학사주점 인근에 조그마한 사무실도 하나 내고, 간간히 토론회도 열었다. 토론회에서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한국의 정치, 경제 문제가 자주 도마에 올랐다. ‘술에서 신화까지’를 우리의 모토로 내걸었던 이유는 우리가 ‘술장사’에만 그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1967년에 미국유학을 떠났고, 1968년 공부에 쫓기고 있을 때, 학사주점 간첩연루 사건이 터졌다. 나는 그때까지 사건 배후를 모르고 있었고, 오히려 내가 귀국할 수 없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양심적으로는 떳떳했지만 간첩연루자 모두를 알고 있던 나의 처지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교수발령을 받게 되고서 이런 걱정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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